김 신 환(편집자문위원)

우리사회는 일반적으로 지식인과 지성인을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과 지성인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과 지성인은 분명 차이가 있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워서 알게 된 인식이나 이해 즉 배워서 알고 있다는 뜻이지만 지성은 그 배움을 실천하고 행동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이타적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한다면 무난할 듯하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는 지성인은 이것만 가지고는 지성인으로서는 부족하다. 지성인은 사심 없는 양심과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맹목적으로 시류의 흐름에 타협하거나 휩싸이지 않아야 하며, 특히 감정에 치우쳐 편향적이지 않아야 한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말한 객관적 정의감이 있어야 하며, 맹자의 대장부에서 언급한 “늘 바른 자리에 서려(立天下之正位)”는 모범적인 실천적 자세를 견지할 때 그때 비로소 지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안다는 지식인이 되기는 쉽지만 한 사람의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요즘 우리사회가 갈수록 인심이 피폐해지는 경향이 있다. 물질적여유가 없는 까닭일까!

사랑과 화해는 부족하고, 칭찬보다는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며 , 긍정보다는 부정이 앞서고 사랑보다는 미움을 가까이 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사람들이 결단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남을 질시하거나 미워하는 부정적 사고는 우선하여 스스로가 감정을 상한다는 사실이다 행복이 기회가 아니고 선택이듯 즐거운 삶을 살려면 부정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 일이다.

또한 갈수록 국가적으로는 총체적인 무역량이 늘어나고 국민 총생산이 올라가는데도 사회적 삶의 질은 왠지 탐탁치 않다. 이러한 원인은 부의 편중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구조에서 각자 원하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적 한계도 문제지만, 이중 가장 큰 불협화음 중 하나는 지성이 부재한 기계화된 작금의 지식사회에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상생이 배제된 나만 잘 살면 그만 이라는 극단적 이기주의, 나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어떤 사회악도 외면해버리는 사회적 환경과 사회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부자로 잘산다고 한들 우리는 미국의 유명한 행복경제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 교수의 “소득이 높아져도 꼭 행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에서처럼 소유가 행복의 척도라고 크게 착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뒤돌아볼 일이다. 다시 말해 소유와 행복은 어느 정도는 비례하지만 소유가 행복의 절대적 요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살기 좋은 사회란 잘살고 못사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면서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사는 화목한 사회적 토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우리사회 지성인이 많지 않다 심지어 화해를 말해야 할 유지들까지도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면서 진실이 필요할 때 침묵으로 , 또 더러는 강자 편에 서서, 소신 없이 얄팍하게 외눈박이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퍽이나 많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 옳고 그름을 변별하여 선도할 지성인이 없음이며 날로 지성의 구심점이 얕아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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