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렬 교수(전남도립대학교 경찰경호과)

한국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저서에서 이나미는 ‘성공한 사람은 자아가 고양되어 죄의식이나 남에 대한 배려도 줄어들 수 있다. 선민의식으로 사람을 가려 사귄다면서 정작 속내는 허접한 이들과 폐쇄적으로 어울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고 진단한다. 나아가 이 박사는 ‘사회의 기대치는 높아지는데 내면은 오히려 취약해져 병든 이들도 많다. 유명인이나 지도자들의 공허한 실상이 드러나면 본인뿐 아니라 주변까지 충격으로 혼란스러워진다.’ 여자나 돈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이들 중에는 의외의 인물들이 꽤 있다.

사실 리드로 성장할수록 주변에서 쓴소리를 해 주는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 나의 생사를 좌우하는 강자에게 바른 말을 하는 강심장은 많지 않다. 실제로 자리가 높고 돈이 많아질수록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지고, 스케줄이 바빠지고 책임져야 할 이들도 늘어난다. 그러면 겉은 부산하나 내부는 점점 더 공허해 진다. 그 간극으로 인한 자기 소외를 못 견디고 이상한 방법으로 긴장을 풀려는 경향도 생긴다. 술. 도박. 엉뚱한 투자. 성적 탐닉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정신분석학자 융의 말처럼 중년기는 ‘영적 위기’가 도래하는 시기다. 게다가 이 중년의 고위공직자들은 남에게 사정하고 부탁할 일이 별로 없다. 굳이 자기 돈을 쓰지 않아도 직책을 매개로 떳떳하게 인사를 받거나 할 수 있다. 자신이 잘 났기 때문에 성접대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종의 우월의식, 선민의식이다.

진화심리학에 ‘공작의 깃털’이라는 유명한 어구가 있다. 공작의 깃털은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실제 생활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오히려 화려한 깃털 때문에 노출되어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암컷을 유혹하는 데 깃털만한 것이 없다. 화려한 깃털을 쭉 펼치면서 존재감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성적 이탈로 문제가 된 정치인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정치는 공작의 깃털같은 존재다. 수컷으로서 자신의 매력도를 올리고자 입신양명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어떤 이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면 조직의 여직원을 성적으로 소유하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자신에게는 성추행할 권리, 성폭행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생각으로만 멈춘다.

존슨이 대통령 재임 중에 자신의 고향인 텍사스의 집안 농장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물론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해 많은 수행원이 따라와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젊은 여성 보좌관이 겪은 일이다. 하루 일을 마친 그녀는 따로 마련된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침대 발치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누구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회중전등을 들고 서 있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고 한다.

‘옆에 좀 눕자, 나 대통령이야’ 바로 존슨이었다. 그 목소리엔 일말의 주저함과 대통령으로서의 체면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누가 묻기도 전에 이와 같은 자신의 엽색행각들을 공공연하게 떠들어 대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상대를 곡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귀를 닫아 버리는 것이다. 권력자가 측근들에 둘러싸여 시중 여론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성 윤리도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뻔하게 감춘다. 이는 위력에 의한 성범죄이다. 법이나 권력에 가까이 있고 익숙한 이들일수록 부패혐의가 자신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는 이가 많다.

위력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력함. 또는 그런 힘’이라고 나와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면 위력에 의한 관계는 인간의 역사와 그 궤를 나란히 한다. 인간 사이에서 힘의 격차는 늘 있어 왔고, 그 힘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투쟁이 곧 민주주의 투쟁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권력의 남용은 자기쾌락의 노예가 됨으로써 발생한다. 그것은 자유의 상실을, 자신에 의한 자신의 노예화를 초래한다. 푸코는 자기배려의 실천을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과 연결시킨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독재적 권력을 행사할 위험은 자기 자신을 배려,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 욕구의 노예가 되었기에 생겨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왕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다. 특히 권력과 여인, 이 두 단어는 뭇 사내들을 취하게 한다. 사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자칫 분별력을 잃게 만든다. 그 함정에 빠지는 순간에 지혜의 샘도 막히고 빨간 경고등을 보는 눈마저 멀어져 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이 또한 보편적인 상식이다. 

최근 들어 미성년자 성폭력범이나 권력관계를 이용한 직장 내 성희롱 그리고 학교나 공공장소에서의 성추행이 증가하고 있다. 성범죄 관련자들도 고위 공무원을 비롯 각계각층이다. 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토록 추해지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경제와 첨단과학 문명의 발전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며, 이런 발전을 통해 편리하고 안락한 세상은 만들어졌는데, 이에 따른 건강한 의식이나 건전한 여가 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다. 문명의 얼굴은 가졌는데 가슴은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달리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이 비극의 자동차에 브레이크의 역할이 절실한 것이다. 속도는 경제력이나 군사력이나 권력을 낳을 수는 있지마는 내 삶을 키우는 위대한 사상을 낳아 주지는 못한다. 가부좌를 한 사유불상처럼 생명의 사상은 정지의 몸짓을 요구한다. 사상은 보리처럼 천천히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빠른 바람 속에서는 영근 곡식이 쏟아지고 말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율곡 이이 선생님이 스스로를 일깨우는 ‘自警文’에서 말씀 했듯이, 남이 보거나 안보거나 조심스레 인격을 닦고 도덕성을 높이는 愼獨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인격과 삶을 존중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나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목적적 존재로 여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도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피십시오’라고 했다. 온갖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가 늘 조심스레 바른 삶을 배우는 마음 곧 學人의 마음으로 그리고 겸허한 수행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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