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현(자유기고가)

지난 16일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 (UI)에서는 인도네시아 역사연구 단체인 ‘히스토리카’(Historika) 주최로 한 세미나가 열렸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장투쟁에 같이 뛰어들어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기여했던 외국인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세미나였다. 그 외국인 공로자들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바로 조선인 양칠성이었다.

도대체 양칠성은 어떻게 하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 되었으며 고향 땅인 전북 완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가룻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일까? 1919년 전북 완주군 삼례면에서 태어난 양칠성은 23세 되던 해인 1942년 강제 징집되어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3년 여간 연합군 포로 감시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양칠성은 연합군에 항복하지 않고 도주하였고 다시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식민지화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현지인들과 함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간다.

연합군에 즉각 항복하지 않고 일본인 상사 두 명과 함께 도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사실을 들어 양칠성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나는 당시 양칠성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포로감시원 신분으로 연합군 포로를 직접 착취하고 학대하는 일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던 양칠성은 항복할 경우 바로 전범재판에 회부될 것이고 그리 되면 그리워하던 고국산천을 영영 밟지 못하리라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종전을 얼마 앞두지 않고 현지인 아내와 결혼했으므로 한 남편이자 한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하여 깊이 고민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항복하지 않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양칠성은 좋은 때를 기다리느라 마냥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그의 마음 속 바람대로 일본은 패망하고 인도네시아는 자유를 되찾았지만 네덜란드군은 다시 진주하여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현지인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고문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일본군이 저질렀던 옛 만행 ( 죄 없는 현지 여성 강간 )을 따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손기술이 뛰어났던 양칠성은 폭파 기술과 사격술을 인도네시아 독립군에게 가르쳐주고 게릴라 투쟁에 직접 가담하여 네덜란드 군용열차가 다니던 다리를 폭파하기도 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결국 1949년 붙잡혀 총살당하고 만다. 처형 직전 일본인 상관들과 함께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목격담도 있고 인도네시아어로 독립과 자유를 뜻하는 ‘메르데카 (Merdeka)’를 외치고 죽었다는 목격담도 있다. 그 당시 양칠성의 마지막 외침은 녹음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영원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양칠성을 향한 멸시와 비난이 상당한 만큼 양칠성을 향한 존경과 찬양 역시 그만큼의 양을 이 세상은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저널리스트 헨디 조하리가 찾아낸 양칠성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처연하다. 마지막 기록사진 속 양칠성의 슬픈 시선은 그의 모든 심정을 우리에게 표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 하여 내 운명은 이리도 기구하단 말인가?’ 반면 같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일본인 상관 아오키 상사는 환하게 웃고 있다. 마치 끝까지 자랑스러운 황군(皇軍)의 일원으로 싸우다 죽음을 맞게 되었으니 더 이상의 아쉬움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가히 확신한다. 양칠성의 마지막 외침은 ‘천황폐하 만세’가 아니라 ‘메르데카(인도네시아어로 독립 혹은 자유를 뜻함)’였을 거라고. 나는 변호한다. 양칠성이 중간에 어떤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어떤 비난을 받는지에 상관없이 그 역시 잘못된 역사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일뿐이라고.

굳이 죄에 대해 논하자면 양칠성의 죄는 있으면서도 없고 또 없으면서도 있다. 아니 죄가 있으나 충분히 용서받아야 할 죄이고 죄가 없으면서도 시대가 억지로 갖다 붙인 그만의 숙명으로서의 죄목(罪目)이 많다고 하는 것이 더 나은 비유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식민지 조선 땅에서 태어난 죄, 자신이 남양군도로 가지 않으면 가족에게 식량배급이 끊긴다는 것을 알기에 자발적인 지원 형식으로 손도장을 찍어야 했던 죄. 그리고 살아남고자 상관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야 했고 이에 포로들을 가혹히 다루었던 죄. 마지막으로 곧 태어날 자신의 후손은 식민 지배의 설움을 당하지 않고 당당한 자유와 정당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끔 만들려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뛰어든 죄. 그의 죄(?)는 일일이 열거하고도 남음이 없다.

74주년 광복절이 지나갔다. 위안부 피해자 분들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던 분들은 널리 기억되고 있으나 아픈 역사의 또 다른 피해자인 3000명의 조선인 군속은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그들은 대부분 영어나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엘리트 신분이었고 단지 외국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강제 징집되어 머나먼 이국에서 일본군이 해야 할 악역을 대신 맡았고 결국에는 전범의 멍에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148명이 포로학대에 직접 가담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중 23명은 사형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이들 중 십여 명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는 등의 방법으로 저마다의 한(恨)을 스스로 끝냈다.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강제 징집되어 태국에서 통역과 포로관리를 담당했던 조문상은 사형 집행 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유령으로라도 자유로이 떠돌고 싶다. 그도 불가능하면 누군가의 추억 안에서라도 기억되고 떠돌고 싶다.”

양칠성과 조문상 그리고 3000여 조선인 군속은 대한민국 국민에 의하여 기억되고 넋을 위로받으며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 야나가와 시치세이(양칠성)의 국적을 되찾아준 이가 우쓰미 아이코 일본 게이센여학원대 교수였고 마지막 조선인 전범 생존자로서 조선인 군속 희생자들에 대하여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보상할 것을 요구하고 투쟁해오고 있는 이학래 옹 (현 94세)의 일생은 일본 호세이대학교 학생들에 의하여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B. C급 조선인 전범 피해자 명예회복 입법’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해 온 이들은 일본 중의원 출신 정치인들이다.

지금부터라도 3000여 조선인 군속 및 B. C급 조선인 전범에 대하여 정치권과 학계 및 언론계는 관심을 가지고 합심(合心)으로 노력하여 명예회복과 유가족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해방된 지는 오래이나 해방되지 못한 영혼이 수없이 많음을 우리는 필히 알아야 한다.

 

저작권자 © 담양곡성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