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담양군청소년수련원 초입에 설치된 이날치 기념비.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 담양군청소년수련원 초입에 설치된 이날치 기념비.

한국관광공사가 해외홍보 영상으로 제작한 '한국의 리듬(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가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날치밴드' 음악에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의 춤사위를 입혀 배포한 영상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정부 홍보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이날치 밴드의 곡 <범 내려온다>는 국악이나 판소리를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만 여겼던 젊은 층으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본지는 근래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날치밴드의 원조(?)격인 조선의 국창 이날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기사는 필자가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2005년 9월에 취재 보도했던 기사로 독자들에게 이날치에 대한 바른 정보를 제공하고자 다시 지면을 통해 공개한다.(편집자)

 

"일세를 풍미한 서편제의 수장“

담양이 낳은 명창 이날치는 후기 8명창 중에서 서편 소리를 대표하는 소리꾼이다. 신재효 선생의 문하에 동편으로는 박만순, 김세종 등 기라성 같은 소리꾼들이 있었다면 서편 소리꾼으로는 이날치 명창이 있었다.

이날치는 본명이 경숙(敬淑)이고 1820년 담양군 창평면에서 태어났으며 만년에 장성으로 거주를 옮긴 다음 향년 72세로 생을 마쳤다. 날치는 예명인데 칼날같은 성품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도 하고, 날쌔게 줄을 잘 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날치의 출생과 고향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언급할 수 없으나 월간 금호문화 (1991년 5월호, 김경주 글, 명인들의 고향)에 실린 기사를 보면, 본래 이날치는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 얼그실마을 유씨 집안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유씨 집안의 한 사람이 후에 수북면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그 때 이날치도 주인을 따라 수북면으로 옮겨왔다고 기술되어 있다.

기사에는 이 이야기를 서당에서 전해들었다는 수북면 대방리 우원종 노인의 증언이 실려 있지만 지금은 타계하고 없어 확인할 길은 없다. 기록을 찾던 중 90년대 초, 당시 순천대학에 재직했던 이국자 교수가 쓴 '판소리 예술미학' 80쪽에 '푸르고 아름다운 청소년야영장이 있는 수북면 병풍산 아래 김채만의 스승 이날치가 득명하기 전, 심부름하며 지냈다는 집강(면장) 집을 둘러보고 이날치 기념비를 보러갔다'고 기술되어 있어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후손인 유병기씨(47)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집터는 오랜 세월 탓인지 돌담만 남겨둔 채 자취를 감췄고 지금은 텃밭으로 변해 있었지만 주위를 감싸도는 감흥은 금방이라도 이날치가 뛰어나와 한바탕 재주를 넘는 듯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당시에 이 집 주인은 유한기씨로 이조 말엽 창평면장을 지냈다고 하는데 관직에서 물러난 후 수북면 나산리로 이사를 했다가 원대방(현 대방리 2구)을 거쳐 대방리 3구 현 위치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아들인 유광수씨는 작고하고 지금은 며느리인 김원순 할머니(76)와 손자 유병기씨 가족이 집터를 지키고 있다.

유병기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인 유광수씨로부터 전해들은 이날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아직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날치 그 양반 대단히 총명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수북으로 이사하면서 데리고 왔는데 워낙 총명해서 한문은 물론 풍수지리를 금새 깨우쳤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풍수지리를 가르쳤는데 어느새 할아버지를 능가하는 탁월한 재주를 보여 우리 증조부모 유택을 점지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날치가 점지해준 병풍산 기슭에 우리 증조부모 묘소가 아직 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확실히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이날치는 총명해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듬뿍 받았고 서울, 장성 등지로 자주 심부름을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이날치가 서울 심부름을 다녀오던 중 우연히 창을 하는 곳에 들러 소리하는 모습을 보게 됐고 그 후 창에 대한 집념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생각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종놈이 점지해준 곳에 부모를 모실 수 없다"며 증조부모 묘소를 옮길 것을 지시해 사람들이 이장을 하려고 묘소에 삽을 대는 순간 증조부모 묘소에서 불기둥이 치솟는 것을 보고 그만 되돌아왔는데 그후부터 가세가 기울어 살림이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증조부모 묘소를 정성껏 복원하고 예를 다한 결과 지금은 후손들이 모두 잘 살고 있다며 이날치 그 양반이 묘자리를 잘 잡아준 덕이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명창의 뜻을 품고 고행길로“

기록에 의하면 이날치는 수북면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뜻하는 바가 있어 광대들과 어울려 떠돌아다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줄타기에 소질을 보여 이내 줄타기의 명인이 되었으나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줄타기 광대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당대 동편제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박만순의 수행고수가 되었다.

이조말엽 철종이 왕위를 계승할 적자가 없이 세상을 뜨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가 곧 고종이다. 당시 섭정을 했던 대원군은 유달리 판소리에 심취하여 전국의 소리꾼을 불러모아 곁에 두었다. 당시 활약했던 명창들로는 박만순, 이날치, 김세종과 여류명창 진채선 등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날치는 박만순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박만순은 송흥록의 수행고수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소리를 배웠기에 그 거만함과 자만은 어느 권력과 권세에도 눌리지 않았다. 워낙에 출중한 기예를 가졌기에 그런 오만함이 가능키도 했겠지만 당시 천민취급을 받던 소리꾼들이 흥선대원군 같은 막강한 실력가의 후광을 업게되자 마치 지난 시절의 한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런 시대적 상황 아래서 명창의 뜻을 품고 입적한 수행고수 노릇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박만순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그의 소리와 기예의 수법을 보고 들으며 수련하던 이날치는 박만순의 오만방자한 성품에 비위를 맞추기 어려웠다. 더구나 10년이나 연상인 자신에게 고수라고 경멸하며 온갖 시중을 들게 하고 심지어는 세숫물과 발 씻을 물을 떠오라 하자 그만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날치는 대야에 떠온 물을 박만순의 얼굴에 쏟아버리고는 그길로 박만순의 곁을 떠나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 들어가 각고 끝에 마침내 득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날치가 곧 대명창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날치의 대성은 서편제 소리를 창시했다는 박유전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지도 아래 서편소리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한 결과였다. 박유전은 전북 순창 출신이며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사람인데, 대원군이 실각하게되자 낙향하여 말년에는 전남 보성에 살며 정재근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고난 재능으로 서편소리 섭렵“

이날치는 수리성(거칠고 탁한 소리)의 큰 성량과 슬프고 한 서린 목소리를 장기로 하여 서편소리를 섭렵해나갔고, 마침내 서편소리의 묘미를 체득하여 나중에는 박만순, 김세종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 정도로 대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식자들 사이에서만 칭예를 받던 박만순의 동편소리와는 달리 이날치의 소리는 남녀노소, 시인묵객, 초동목수(나무꾼) 할 것 없이 찬미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박황의 '판소리 이백년사'에는 이날치에 대해 이렇게 적고있다. 그 한 대목을 살펴보면 '포부가 남달리 호대하고 기예가 또한 비범할 뿐 아니라 그 수리성의 성량이 거대하여 춘향가 중 신관사또 부임대목에서 나팔소리를 흉내내면 실제 나팔 소리와 구별이 안 될 정도였고, 인경소리를 뎅뎅하고 내면 정말 인경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소리할 때 한창 흥이 나서 소리가 가경에 이르면 성음의 절묘함에 청중의 탄성과 박수갈채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애원한성으로 듣는 사람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는가 하면 회해골계한 형용과 동작으로 청중을 포복 절도케 하는 그 광경은 실로 천하의 장관이었다고 전한다.

'이날치는 판소리에 두루 능통하였지만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에 뛰어났고, 스승 박유전에게 이어받은 ‘새타령’은 당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가 새타령을 노래할 때 온갖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내면 진짜 새가 그 소리를 듣고 날아왔다고 한다. 漢詩 詩人 우정 임규(偶丁 林圭) 선생도 "어렸을 적에 심곡사에서 이날치의 새타령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분명히 새들이 날아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날치는 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어전(御殿)에서 여러차례 소리를 하였고, 대원군은 이런 이날치를 총애하여 무과 선달(先達)의 직계를 제수하였다.

이날치가 서울 장안의 명창으로 풍미하던 당시의 유명한 일화 한 토막이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수록되어있어 소개한다. 대원군의 형이자 재상인 이최응(李最應)은 성질이 몹시 꼬장꼬장하여 결코 얼굴에 희노애락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이 죽는 것을 보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느날 재상 김병학과 자리를 같이하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화제가 명창이야기로 옮겨졌다. 김병학은 ‘명창은 능히 사람을 울리고 웃긴다고 하는데 이날치야말로 정말 그러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최응은 꼬장꼬장한 성음으로 즉시 반박을 놓았다. "그럴리가 없오. 혹여 있다고 하더라도 졸장부라면 모르거니와 기백있는 대장부가 어찌 한낱 비천한 광대 소리에 감정이 좌우되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오." 하여 서로 다투다가 이날치를 직접 불러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이최응은 이날치를 불러 "네 소리에 감동을 받아 울게되면 상으로 금 천냥을 내리겠지만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을 시에는 너의 목을 치리라"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이날치는 흔연스럽게 만좌 앞에서 심청가 중의 심청이가 부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3백석에 몸이 팔려 부친과 이별하는 대목에서부터 남경장사 선인들을 따라가 인당수 깊은 물에 빠지면서 부친이 절규하는 광경까지 그 비참한 인생의 최후를 애사비조로 표현하였다. 청중은 모두 울었고 이최응도 심청의 효성에 감격하여 인생의 비애를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최응은 이날치의 손을 잡고 "명창은 능히 사람을 울리고 웃긴다고 하더니 과연 빈말이 아니로다. 그대야말로 대명창일세" 하고는 금 천냥을 상으로 내렸다고 한다. 서편소리가 계면조의 오열처창함과 애원처절의 감상적인 소리형태라 했을진데 그의 특장인 심청가의 가장 슬픈 대목을 불러 제꼈으니 뭇사람들을 울리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女孫에게 전해진 명창의 재능“

여느 소리꾼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일가친척은 물론 무덤까지도 찾기가 어렵다. 이날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가 말년에 거주했다는 장성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어느 지관이 이날치에게 "장성쪽에 가서 살다 죽어 그곳에 묘를 쓰면 후손이 번창하리라"는 말을 듣고 장성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만 전해올 뿐.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으셨는지 이날치의 女孫이 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뒤를 잇고 있음이 밝혀졌다.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가르치던 이일주 여사(69)가 바로 이날치의 4대손이다. 그녀는 이날치의 피를 이어받았던지 소리에 또한 선대의 재질을 담고 있었다.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판소리 부문 장원을 한데 이어 1981년에는 서울 국립극장에서 심청가를 완창하였고 1989년에는 KBS국악대상을 수상하였으며 1983년에 전라북도 도지정 무형문화재 '수궁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일주 여사의 부친은 이기준씨로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서천, 서산 등지에서 살았으며 이일주 여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이날치가 임금에게서 받은 교지를 보여주며 임금님이 하사하신 금토시를 하고서 소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러나 6·25전란 중에 그런 교지들이 몽땅 없어져버려 못내 아쉽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이날치는 각종 고전에 정통하였고, 특히 춘향가 심청가를 잘 하였으며, 전무후무한 그 새타령은 제자인 이동백(李東伯)에게 전하였다. 이날치의 더늠(명창들에 의해 사설과 음악적 표현이 새로 만들어지거나 다듬어져 이루어진 판소리 대목)으로 춘향가 중에서 춘향의 자탄가인 망부사 서름제가 김창환, 전도성의 방창으로 전하고 있으며 이날치의 문도로서 이득권(李得權), 김채만(金菜萬), 이창윤(李昌允), 강용환(姜龍煥), 최득(崔得)등이 대를 잇고 있다. 이날치는 72세인 189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국창(國唱) 이날치를 기리기 위하여 담양군 수북면 성암청소년수련원 입구에 기념비를 세웠다. /한명석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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