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최초의 女性 장례지도사, 박정애 현대장례식장 대표

“이승과 저승의 징검다리 역할에 만족해요”

2008-12-02     정종대 기자



“장례일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독하게 마음먹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라 남다른 사명감도 필요하죠.”

올해로 11년째 장례지도사 일을 해오고 있는 박정애(43·현대장례식장 대표)씨는 일반인들은 물론 금남의 영역으로만 알고 있는 장례지도사 일을 女性이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음독과 교통사고, 실족사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대하면서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장례 예법과 절차에 따라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갖추고 유가족들과 아픔을 같이 하기도 한다.

입관을 하다보면 참 많은 사연이 있는 사람을 대하게 된다.
박씨는 가족의 보살핌 없이 혼자 사시던 분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대로 방치되어 쥐가 시신을 훼손, 절반은 뼈만 앙상하고 절반은 살점이 뜯겨 나가 베테랑급 장례지도사들도 손사래 치던 것을 용기를 내어 입관을 치른 적이 있었는데 연락두절로 나타나지 않은 유족들의 마음까지 대변, 정성을 다해 모신 것이 아직 생각해도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한다.

또한 90세 할머니가 집을 나간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처마에서 望夫石처럼 돌아가셨는데 장례가 끝날 때 까지 오지 않은 무심한 유족에 대해 한없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는 등 그동안 박씨의 손을 거쳐 이승의 한을 씻고 영면의 세계에 향한 이들이 1300여명에 달한다.

그는 “죽은 사람은 떠나야하고 남아있는 유가족들은 떠나보내야 하는 입장에서 우리들은 이들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며 “가족들이 입관을 지켜보면서 설움에 북받쳐 통곡하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플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입관 순간이 다가오면 유가족들은 이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동안 못해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섞인 울음을 한꺼번에 토해낸다. 항상 하는 일이지만 죽은 사람을 영영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들의 절박함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그 때마다 마음이 쓰라리고 아프다고 박씨는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박씨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고 애쓴다.
그는 “1시간에서 1시간 반이 소요되는 입관을 하다보면 가족들이 손을 부여잡고 ‘고맙다’는 말을 할 때가 많다”며 “예법에 맞춰 입관을 치르고 죽은 사람을 보내주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염사 옷(입관을 할 때 장래지도사가 입는 옷)’을 입었다.

천수를 다한 노인을 떠나보내기 위해서다. 이날 입관에는 유가족 8~9명이 자리를 같이해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고인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감췄다.
박씨는 이 일을 시작하고도 쉽게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했다. 일의 특성상 내세울만한 직업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가족과 남편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돼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가족에게 말을 꺼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편이 알게 됐다. 생경하던 일을 처음 접한 초창기 자택에서 돌아가신 이들을 위해 일손이 딸리는 유족과 함께 천막도 치고 정성을 다해 염도 하고 장례 뒤처리까지 하다 보니 집안일에 소원해진 것을 눈치 챈 남편의 의심(?)을 풀어주고 언젠가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여겨 자신의 일을 당당하게 밝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연시 여기듯이 남편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두 아들은 물론 남편의 든든한 지원 속에서 일에 전념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장례지도사의 길로 박씨를 인도한 것은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두터운 정을 나누었던 막내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계기 아닌 계기가 됐다.

공군 제1전투비행단 장교들의 식단을 책임지다 관광버스 기사로 종사했던 박씨지만 온몸이 시퍼렇게 멍든 채 영안실에 누워있는 동생을 목 놓아 불러보고 흔들어 깨우기 위해 기운이 소진될 때까지 노력했지만 대답 없이 떠난 동생의 차디찬 주검이 그녀를 새로운 직업으로 이끌었던 것.

장례지도사일을 하기 위해 나선 박씨를 위해 장례업계는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장의사를 찾아가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무보수 조건으로 기초부터 탄탄히 배워나갔다.

특히 그녀는 지극 정성으로 시신을 대했다. 대표적인 것이 염습할 때 마스크도 하지 않고 제 가족처럼 머리부터 발끝가지 깨끗이 씻겨주는 모습은 경건함 그자체로 이를 지켜본 남성 장례지도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특수한 직업인만큼 그만큼 수익도 많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자 생각과는 달리 큰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의 중개역할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장례지도사들의 주 역할은 입관이지만 장례식 전반을 관리하고 이끈다.
박씨는 시신을 수습하면 제일 먼저 시신을 반듯하게 눕힌다. 칠성판이란 오동나무로 된 판에 시신의 몸이 굳기 전에 팔과 다리를 곧게 펴 반듯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초렴이라고 부른다.

이후 발인 전까지 시신의 수의를 입히고 몸을 닦아 입관하는 과정까지를 대렴이라고 지칭한다. 이 모든 과정이 장례지도사로서 박씨가 하는 일이다.
박씨는 “가족과 주위 친구들에게 이 일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반대로 한동안 마음고생도 많았다”며 “하지만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고 무엇보다 이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어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지도사 자격증이 있다고 해도 이 일을 곧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관을 할 경우 대부분 2명의 장례지도사가 들어가 일을 하게 되는데, 한명은 보조역할을 수행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장의사라는 직업이 성행했다. 죽은 사람에게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만큼 우대를 받는 직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조회사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장례지도사들도 많이 배출되면서 예전처럼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대규모로 운영되는 상조회사들이 장례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장례가 상업적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지만 고인을 떠나보내는 장례 의식과 마음가짐은 여전하다.

박씨는 “간혹 입관을 하다보면 어떤 상주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애써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게 되고 어떤 상주는 호상이라고 해 사실만큼 잘 살고 갔으니 괜찮다고 말하기도 한다”며 “하지만 아무리 잘살고 아름답게 떠났어도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지금 살아있는 동안 내부모와 내 자식, 내 이웃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직업인으로 당당한 그녀는 한국장례업협회 광주 전남북지회의 도움으로 광주여성발전센터를 비롯 각종 강단에서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특히 장례 절차와 문화에 관해 강의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이 직업에 대한 막연하게 생긴 고정관념도 말끔히 씻어낸다.

갓 불혹의 나이를 넘긴 박씨지만 장례업계에서는 연로한 고문(?)격 대우를 받는 그인지라 정년후의 삶을 소중하게 그려가고 있다.
‘돈을 위해 일하지 말자’는 그녀의 신념을 끝까지 고수하기 위해 “기초수급대상자, 독거노인, 장애인, 무연고자 등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삶을 영위했던 이들의 장례를 무료로 치러주는 행복한 장의사가 되는 것이 소중한 꿈이다”고 말한다.

亡者를 보다 아름답고 편안하게 즐거운 추억만을 안고 저승으로 안내하는 직업을 가진 박씨가 흘린 땀방울들이 떠나는 이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세상에서 태어나 마지막으로 입고 가는 수의를 정성스럽게 접는 박씨의 손짓 하나 하나에서 이승을 하직하는 두려움은 그리움으로 승화된다.
/정종대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