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미학산책(6) 독수정

홀로 있어 즐거운 산수정원

2012-03-13     조상현기자

남면사무소에 못미치는 지점, 남면초등학교 앞 맞은편에 ‘독수정원림’이란 푯말을 볼 수 있다. 안내판을 따라 마을 뒤편을 오르면 나지막한 산허리에 유달리 숲이 우거진 곳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무등산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뻗어나간 한 지맥이 구릉을 이룬 곳에 100년도 더 됨직한 거목(巨木)들이 즐비하다. 마치 속세를 떠난 느낌이 든다. 숲의 한 가운데, 조선이 건국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고 맹세한 고려의 충신이 세운 정자가 있다.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인적이 드물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주는데. 그 옛날 정자를 짓고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눈물과 그리움으로 한평생을 보낸 선비의 통곡 소리가 묻어서일까.

소쇄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독수정은 고려말 충신의 절개를 상징하는 원림이다.
공민왕 때 북도 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은 고려가 멸망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여 벼슬을 버리고 담양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고 숨어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독수정이란 명칭은 이백의 시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인가? 서산에서 지조를 지키다 굶어 죽은 사람이지”(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에서 따온 것으로, 높은 절개를 짐작케 한다.

“두 왕조를 어찌 섬기랴”

‘불사이군’ 충절을 지킨 무신
서울 떠나 담양서 정자 지으며 여생
유독 북쪽을 향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
일편단심으로 눈물과 그리움에 사무치듯

‘세상과의 단절’, 세상이 자기의 뜻과 맞지 않다고 하여 철저하게 그것과 단절을 해 버렸던 그는 이성계가 왕이 되어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아침마다 조복(朝服)을 입고 고려의 수도 송도를 향하여 곡하면서 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느 정자들과 달리 유독 독수정만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는 고려의 수도를 염두해 둔 까닭이다. 당시의 심정을 읊은 시(독수정원운)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風塵漠漠我思長
何處雲林寄老蒼
千里江湖雙雪
百年天地一悲凉
王孫芳草傷春恨
帝子花枝月光
卽此靑山可埋骨
誓將獨守結爲堂

바람과 티끌은 아득하고 나의 감회는 깊은데
어느 깊숙한 곳에 이 늙은 몸을 부쳐둘까?
천리 밖 강호에서 두 귀밑머리는 흰 눈빛이 되고
백년 가까운 세월에 슬픔만 남아 있네
왕손과 꽃다운 풀은 봄의 한이 서렸고
두견새는 꽃가지에서 달을 보고 우누나
바로 이곳에 뼈를 묻히려고
나 혼자 지키며 이 집을 얽었다네

독수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가운데에 방이 있는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특히 전신민은 정자의 앞에 대나무를, 뒤편에 소나무를 각각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고 전한다.
독수정 주변 또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독수정 주위엔 느티나무, 회화나무, 왕버들,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 등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선 숲이 조성돼 있는데, 이 일대를 가리켜 독수정 원림이라고 칭한다. 독수정 앞뜰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산수유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독수정 원림은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원림 기법을 담양지역에 들여오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입구에서부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진입로는 호젓한데다 삼림욕을 하기에도 그만이다.

독수정은 여름에 찾는 것이 제격이다. 봄철 독수정에서는 온통 파스텔을 칠해놓은 듯 화려한 산들을 만나고, 가을이 되면 온 산의 단풍이 독수정까지 물들인다. 천지가 흰 눈에 뒤덮인 겨울이면 오염 없는 독수정이 된다.

그래도 역시 무더운 여름날 독수정 마루에 앉아 있는 신선이 된 듯하여 눈의 풍요와 마음의 풍요까지 얻을 수 있으니 제격이라 할 수 있겠다.
어느 정자가 여름 한철 지내기에 적절하지 않을까마는 독수정 마루에 앉아보면 그 절정을 만날 수 있다. 방문을 들어 올려 놓으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스럽다. 밀려오는 바람 소리가 거침없이 들어오니 아무 생각없이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취해볼 수도 있다.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자연에 다가가기

고려때 성행한 산수원림기법 들여와
봄·가을이면 온통 파스텔톤 경관 자랑
외부와의 단절성…자연과의 친밀성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주변에 흡수돼

고려말 충신 전신민이 은거했던 곳이기 때문인지 독수정은 마을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최근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무돌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위치 때문에 이 건물의 영역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공간의 단절성을 드러내고 있다. 외부로부터 접근이 쉽지 않게 하면서 내밀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숲과 함께 섞여 공존하니 자연과 친밀성을 확보하고 있다.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정치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에 자기 몸을 합치시키겠다는 뜻일까.
독수정은 양산보의 소쇄원과 많이 닮은 듯 하지만 차이가 있다. 특히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소쇄원은 당당하게 실체를 드러내며 자연으로 나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독수정은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자연에 흡수되는 구조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그러할 뿐 자연을 끌어들이고, 자연으로 나가고, 자연과 어울려 합일되는 인간과 자연의 상생성은 소쇄원이나 독수정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폐쇄성이 대단히 강하면서도 자연에 가깝게 다가가기. 어쩌면 이것이 전신민이 경영한 독수정의 조영원리이지 않았을까.

돌아나오는 길에 다시 한번 독수정을 음미하다 보면 조선후기 사람인 이광수가 전신민을 추모해 지은 시 한 수가 눈에 들어온다.

우뚝 솟은 정자는 세월도 오래인데
섬돌의 이끼는 다시 푸르러 지는구나
깊은 충성으로 홀로 지키다 적막하기만 한데
서은의 시를 읽으니 처량도 하여라
이 산의 고사리도 고려의 색깔이요
소나무 삼나무도 고려의 빛깔이로다
옛날을 돌이키고 지금을 슬퍼하며
눈물만이 흐르니
후인이 이 정자에 오르면 부끄럽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