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미학산책(11) 함허정

학이 날아들 듯 걸림없이 살리라

2012-04-24     조상현기자

섬진강이 굽어 흐르는 곡성군 입면 제월리에 20호 남짓한 작은 강변 마을인 군지촌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섬진강을 끼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을 바라보면 정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젖을 함(涵)에 빌 허(虛). 누정미학산책 기획시리즈의 마지막인 ‘함허정’이다. 함허정에 올라 기와담 아래로 섬진강의 유장한 모습을 보면 ‘비어 있는 마음으로 섬진강에 젖는’ 뜻이 절로 헤아려진다.


섬진강을 낀 나지막한 동산이 봉긋이 솟아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막힌 데가 없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저 멀리 무등산이 백리광야에 드러난다. 또한 소나무가 울창한 낮은 동산은 정자의 배경이 되어 편안한 앉음새에 도움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 조절 기능까지 하고 있다. 굳이 풍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좋은 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가, 이 정자를 관리하는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어 시원하고, 겨울에는 찬바람을 막아주어 따뜻하다고 한다.

섬진강의 흐르는 물과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풍류를 즐겼던 함허정

함허정을 가리켜 일명 ‘호연정’이라 부르고 있다. 당대 학문을 익히던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별칭인데, 아마도 ‘호연지기’에서 따온 듯 하다.

함허정은 단층 팔각지붕 골기와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형 목조기와 건물이다. 구성은 마루 1칸을 3면으로 터 만들었고, 2칸 반은 방으로 꾸몄다. 나머지 오른쪽 반 칸은 바닥을 한 단 높여 쪽마루를 두었다.

16C 중반 무렵, 조선 중종 38년(1543)에 당대의 문사였던 심광형이 말년에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벌써 500년 가까이 섬진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곡성문화원에 따르면, 심광형은 조선 중기에 광양과 곡성 등 여러 곳에서 훈도를 지낸 바 있는 당대의 문사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그의 효행과 예학이 영호남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조정 관리가 그에 대해 언급한 한 상소문에서 ‘효도는 증자를 승습(承襲)하고, 학문은 주자를 따른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백리광야에 무등산 바라보며
세상을 논하고 시를 읊으며
‘호연지기’를 기르다

섬진강의 흐르는 물에 마음껏 여유를 부려보았을 함허정 정자 주변에는 고목이 된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정자에 앉으면 저 멀리 무등산이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이곳에서 시원한 섬진강의 바람을 맞으며, 선비들과 세상을 논하고 시를 읊었을 것이다.

당시 좌참찬 둔암(鈍庵)은 옥과현감으로 부임하면서 함허정을 들렀다. 둔암은 이곳에 올라 강산을 둘러보면서 ‘옛 시에 삼공(영상·좌상·우상)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는데, 아마 이 강산을 가리켜 읊은 것 같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만큼 평화롭고 걸림없는 세상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丈夫何處可消愁(장부하처가소수)
却向湖然亭上留(각향호연정상유)
天地東南英氣華(천지동남영기화)
雲林古今彩輝浮(운림고금채휘부)
引樽豪興浚山嶽(인준호흥준산악)
?檻閒情勝?舟(빙함한정승로주)
朗誦一篇鄒聖語(낭송일편추성어)
胸襟?渺濯淸秋(흉금요묘탁청추)

장부가 어느 곳에 시름을 삭일거나
어느새 호연정에 머물렀구려
천지는 동남쪽에 영기가 빛나고
운림은 고금에 채색이 떠 있구나
술잔 드니 호망한 흥산악을 웅켜쥘 듯
난간에 한가한 情船遊보다 나을세라
맹자의 浩然章을 낭낭히 외우니
가슴이 활짝 틔어 가을하늘 이어라

안으로 들어가 정자를 한바퀴 돌아본다. 한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기둥은 원형기둥으로 세웠는데, 바르게 다듬지를 않았다. 약간 굽은 것도 그대로 기둥을 세워 인위적이지가 않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섬진강 쪽으로 난 기둥들은 안쪽의 기둥들보다 더 많이 갈라져 있다. 아마도 비바람에 그렇게 되었을 듯 하다.

정자를 올려다보면 처마 곳곳에 걸린 편액들이 보인다. 이 많은 편액들이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듯 하다.

500년 전, 함허정에 올라 섬진강을 노래하고 풍류를 즐기던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취향을 상상해본다.

?子江聲滌萬愁(순자강성척만수)
一樽領略?淹留(일준령약만엄유)
長洲曲折蒼龍偃(장주곡절창용언)
大野微茫白鳥浮(대야미망백조부)
我與光陰俱遇客(아여광음구우객)
君將臺??虛舟(군장대사흘허주)
文章仙吏先吾得(문장선이선오득)
不薄風流度幾秋(부박풍류도기추)

순자강 물소리에 온갖 시름 씻고서
둘이서 술 마시며 부질없이 머물렀네
굽이친 강줄기 蒼龍이 누은 듯
아득한 큰 들판에 백조가 떠있구나
이내 몸 광음같은 과객이건만
그대는 정자 아래 빈 배만 띄울손가
문장과 선사를 나 먼저 얻어
흥겨운 풍류로 몇 해를 지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