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月斷想/ “자식에게 비쳐지는 거울”
한명석(발행인)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오래 전 다른 신문사에 근무할 때도 이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류수필가 나백연 씨의 수필집 ‘천금을 담아온 봉투’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박 노인은 부인을 먼저 보내고 아들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60대 후반의 평범한 노인입니다.
어느 날 박 노인이 출근하려는 아들에게 “얘야, 오늘 용돈이 좀 필요한데 돈 좀 주고 가면 안되겠니?”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아들은 정색을 하며 “어디다 쓰려고 그러세요?” 하고 되묻자 박 노인은 “내가 그동안 동네 노인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는데 오늘 약주라도 한잔씩 대접하고 싶어 그러니 3천원만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그럴 돈이 어디 있어요? 그렇잖아도 요즘 돈 들어갈 데가 많아 죽겠는데...” 하고는 그냥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박 노인의 며느리가 출근하는 아들을 뒤쫓아 가서는 “여보,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니까 만 원만 주세요” 하자 아들은 두말없이 돈을 꺼내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돈을 받아들고 온 며느리는 “아버님, 요즘 아범이 어려운가 봅니다. 아버님께서 이해 해 주시고 이 돈으로 친구 분들과 약주도 드시고 재미있게 놀다 오십시오”라며 그 돈을 시아버지께 건넸습니다.
이윽고 퇴근시간이 되어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프다는 아이가 걱정이 되어 아이를 찾는데 아이는 제방에서 혼자 끙끙거리며 울고 있고 아내는 본체만체 부엌에서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아들은 아내에게 “애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느냐”고 묻자 아내가 하는 말이 “이 애도 다음에 크면 당신이 아버님께 하듯 우리한테 할 텐데 애지중지 키울 필요가 뭐 있느냐”며 죽든 말든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말에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아내의 말이 너무 지당한지라 이내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아들은 아버지께 잘못을 빌고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조 명종시대 청백리로 유명했던 백비정승 박수량은 효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고향 인근으로 근무지를 옮겨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다가 돌아가시자 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예를 다 했으며 어머니의 병환을 돌볼 때는 병세를 알기위해 대변의 맛을 보아 차도를 알아냈다 하니 가히 그 효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또 신안 안좌 출신 김경하 효자는 실신한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어머니를 봉양, 다시 눈을 뜨게 했다고도 합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효(孝)는 인간의 기본 도리이며 모든 행(行)의 근본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사회가 복잡한 양태로 변천하면서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는 반인륜적 범죄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듣기에도 끔찍한 일련의 반인륜적 사건들은 어느 사이 우리 주변에 성큼 다가선 가치상실 사회의 극단적인 단면을 보여준 실례라 하겠습니다.
만연된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또 입신과 출세만을 향한 경쟁적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정말로 귀한 그 무엇인가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노인문제가 커다란 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우리 어버이들을 도외시 한다면 패륜과 타락의 수레바퀴 속에서 이 사회는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파멸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이 다 가기 전에 아이들 손잡고 어버이를 찾아 자식의 도리를 다 해야 하겠습니다. 어버이를 모시는 나의 행동이 자식에게 비쳐지는 거울이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