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기철 세상이야기/ 동리산 장군단
범 기 철(칼럼니스트)
전남 곡성출신으로 평산(平山) 신(申)씨의 시조 신숭겸장군은 왕건을 도와 고려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4태사(四太師 :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의 한 사람으로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왕건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과 한 가족의 결의를 맺었다고 해서 이분들의 성씨를 지닌 사람끼리는 결혼을 피하는 풍습이 생겼다.
신 장군은 고려가 개국의 기틀을 마련해 가고 있던 시기에 견훤이 이끌던 후백제와 맞붙은 공산동수대전투에서 왕건이 견훤의 부대에게 포위를 당하자 왕건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 왕건의 복장을 입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전공으로 왕건은 살 수 있었지만 그는 목이 잘리고 말았다.
왕을 대신해 싸우다가 패배한 신숭겸 장군의 목을 후백제 군이 왕건의 목인 줄 알고 꿰어갔다가 뒤늦게 왕건의 수급이 아닌 줄 알고 진(陣)밖으로 던지자 신 장군의 애마인 용마가 수급을 물고 고향과 인접한 태안사의 뒷산(신숭겸 장군이 어릴 적 무술을 연마했던 동리산)에 와서 3일간을 울다가 굶어 죽었다.
이를 발견한 태안사(泰安寺) 승려들이 필시 수급은 신 장군의 머리이고 말은 그의 애마라는 것이리라 믿고 장군단에 말의 무덤과 신숭겸장군의 무덤을 만들어 매년 음력3월 16일(금년 양력 4월15일)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사찰의 승려들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태사개국장절공(高麗太師開國壯節公) 신숭겸 장군의 목 무덤 묘가 곡성 태안사 뒷산 장군단에 모셔져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 같다.
태안사 뒷산을 오르다 보면 장군단을 알리는 안내석이 나온다. 묘소 주변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곳이 바로 장절공 신숭겸의 장군단이다.
‘장절(壯節)’이란 후백제 군과의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 전투에서 살신성인의 위왕대사(衛王代死)로 위기를 모면한 ‘고려 태조 왕건이 자신을 대신하여 장렬히 전사한 신 장군에게 내린 시호이다.
왕건은 신 장군의 사후에도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신 장군이 전사한 것을 애석해하며 짚으로 그의 형상을 만들어 관복을 입혀 앉히고 그를 추모했다고 전해진다.
주군에게 목숨을 바친 신 장군의 충성심과 희생정신은 곡성이 낳은 임진왜란의 의병장 유팽로 장군의 충의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으로 보아 곡성은 충의에 고향임이 분명하다.
신장군은 고려 성종 13년(994)에는 태사(太師)라는 높은 벼슬에 추증,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태묘의 태조 사당에 공신으로 함께 모셔졌다. 또 예종 15년(1120)에는 예종이 서경(지금의 평양)에 행차해 팔관회에서 신숭겸· 김낙 장군 이야기를 듣고 두 장군의 충성심에 감동받아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노래를 지어 그 넋을 기렸다. 이 노래는 신숭겸의 사적을 기록한 책인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에 실려 있다.
장군단에 모셔진 신 장군의 목 무덤은 고려 전형적인 석축으로 둘러싸인 형식이다. 제단석에는 절의 표시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절에서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서기 1934년에 태안사 승려와 유림, 본손이 날짜를 잡아 묘를 더 좋은 곳으로 이장하려고 지관을 불러 미명에 단소 봉분을 파묘하니 석함이 나오는 순간 청명하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소나기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내리쳐 작업을 하던 인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해 봉분을 덮어 버리고 나니 날씨가 다시 맑아졌으며 그 후로도 단소를 더럽히는 자가 있을 때면 큰 구렁이가 나타나 혼내주었으며 또 벌초나 제향을 거르거나 소홀히 하면 귀촉도(歸蜀道: 두견이)가 슬피 울며 고을에 흉년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충신은 가도 그 정신은 만고에 빛난다. 곡성 목사등과 죽곡면 주변에는 용자가 들어간 신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많다. 최근 곡성군에서 신장군의 장군단을 보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늦었지만 참으로 잘한 일이다. 차제에 곡성을 의향으로 자리매김하는 곡성군민의 다짐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