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아들도 고치지 못하는 병

M병원의 특실 문을 열던 나는 병실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 잠시 멈칫 했다.

“내 병 하나 못 고치는 너희가 무슨 의사냐!” S식품 김 회장이 이 병원의 부원장인 아들에게 소리치는 순간에 내가 나타난 것이었다. 더 듣지 않아도 무슨 연유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침뜸 때문에 아들과 아버지가, 아니 의사와 환자가 다투고 있음이 분명했다.

병실에 들어서는 나를 본 김 회장과 부인이 반색을 하자, 힐끗 옆눈질로 나를 확인한 부원장은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김 회장은 나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의사가 뭡니까? 병 고치
는 사람이 의사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의 과장급 이상 의사를 다 동원해도 열 하나 떨어뜨리지 못하는 겁니까?” 숨이 찬 모양인지 김 회장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김 회장은 숨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환자가 바라는 건 병 낫는 것이지, 박사 학위 가진 의사 만나 보자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 너희들한테 치료 안 받는다, 이제 침 치료 받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숨을 몰아쉬는 김 회장의 손을 살며시 잡고 나는 이제 됐다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떡이며 흥분이 가라앉도록 가슴을 쓸어 주었다.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김 회장은 유난히 감기에 잘 걸렸다. 그리고 걸렸다 하면 아주 심하게 앓았다. 그래서 가족들은 항상 그가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김 회장 자신도 감기를 무서워하고 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최고(最古) 의술에 기대를 걸면서


김 회장은 전에도 가끔 나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그 때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었다. 방안에서 침을 놓고 뜸을 떠주고 나면, 뜸쑥 탄 냄새와 뜸에 불을 붙이는 향내가 방안에 가득해진다. 그러면 김 회장 부인은 창문을 있는 대로 다 열어놓고 선풍기까지 동원해 냄새를 없애려고 난리를 쳤다.

쑥내와 향내 때문에 침뜸 치료를 받은 사실을 의사인 아들이 알게 되면 이러쿵저러쿵 싫은 말을 할 테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말다툼을 하게 되니 그걸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던 김 회장이 아들이 근무하는 병원에 누워서 대 놓고 침 치료를 받겠다고 했으니 아들이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김 회장이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최신(最新) 의술로 못 고치고 있으니 이젠 최고(最古) 의술인 침뜸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습니다.” 옆에 서 있는 부인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네, 낫게 해 드릴게요.”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한약 짓는 한의사 노릇이나 침뜸 하는 침구사 노릇하기가 참 편해졌다. 내가 60여 년 전 개업을 했을 무렵만 해도 침구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가 있는 곳으로 끌려 다녀야 했다. 특히 급작스런 위경련이나 뉵혈(?血) 같은 경우는 꼭 새벽녘에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잠을 자다가도 느닷없이 불려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위급하고 위독한 응급환자는 병원 응급실로 가지 나에게 오지 않는다.

나에게 오는 환자는 대부분 처음에는 약국에서 약 사먹다가 얼마 지나 병원에 가고 안 나으니 한약을 먹어보다가, 다시 병원에 갔다가 그래도 안 되니까 할 수 없어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침 치료나 한 번 받아보자고 온다. 그러니 설사 내가 그들의 병을 못 고쳐준다 해도 나를 원망할 환자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잠시, 김 회장이 안정되기를 기다린 나는 기구맥(氣口脈)을 보기 위해 양 손목의 촌구(寸口)를 짚었다. 왼쪽 손목의 촌(寸)에서 심(心), 관(關)에서 간(肝), 척(尺)에서 신(腎)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오른쪽 손목의 촌에서 폐(肺), 관에서 비(脾), 척에서 명문(命門)의 상태를 살폈다. 김 회장은 오른쪽 촌에서 폐의 맥이 강하게 뜨고 양쪽 척의 맥은 약하게 잠겨 있었다.

“요사이 맘에 차지 않는 일이 있으신가 봐요?” 맥 잡은 손을 놓으면서 내가 묻자 김 회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맥을 짚으면 그런 것까지 나옵니까?” “하하! 다리에 힘도 빠지셨지요?” 내 물음에 대답은 않고 김 회장과 부인은 서로 마주 바라볼 뿐이었다.

“욕구 불만 같은 걸로 기(氣)가 발산될 수 없으면 가슴에 열기가 꽉 차 오르고 그러면 폐열(肺熱)이 되지요. 가뜩이나 감기로 폐에 열이 몰려 있던 참이었으니 열에 열을 더한 격이 되고 만 겁니다. 그러니 약이나 주사로 열을 아무리 내리려 해도 쉽게 열이 내리지 않는 거예요. 또 그 폐열 때문에 신수(腎水)가 건조해져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고요.”

그 동안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도 열이 내리지 않았던 이유가 마음 속 응어리 때문이라고 진단하자, 김 회장은 사실 답답한 일이 있었다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입원해 있는 동안 혹시 병원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몹쓸 병에 걸린 건 아닌가 하고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병은 마음이 상해서 오는 병, 이른바 내상병(內傷病)이었다. 내상은 마음 속 에너지의 통로인 경락을 조절해 다스려야 한다. 내상으로 온 폐열이므로, 가장 먼저 폐의 경락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화혈(火穴)인 어제(漁際) 혈을 잡았다. 심이 지나치게 활동하면 폐가 피로하고 약해지므로 심의 경락인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통리(通里) 혈에 침을 놓아 마음의 분란으로 지나치게 활동하는 심장이 안정되도록 했다. /김남수(뜸사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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