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이제와 우리가 담양을 알고 그 뜻을 풀이할 때 한자를 풀어 “아름다운 연못에 햇볕이 반짝거리듯 예쁜 고장”이라 하거늘, 담양 사는 사람들이 담양을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 가면 그 뜻이 바로 ‘본 뜻’이 되어 그렇게 되리라.

요사이 ‘담양(潭陽)’이 관광지로 각광 받고 있는 이유도 물과 볕과 숲이 어우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키기 때문이라 하니 이로써 경향 각지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그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보면 ‘사람이 지어놓고 부르는 이름’이야 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법의 주문’이다.

이에, 우리 사는 이곳의 마을을 둘러보고 그들의 내력과 요즘 사는 이야기를 들어 봄이 제법 흥미진진할 터, 일제 강점기 마음대로 함부로 붙여진 한자 지명을 뜻이라도 바로 알고 붓 가는 데로 우리 사는 담양을 그려 봄이 좋겠구나.


▨ 담양은 왜 ‘담양’일까?

담양(潭陽)의 ‘담’은 갓(邊), 가실(秋), 가슬 ‘양’은 고을

“담양은 왜 담양이라 불렸을까?” 학자들은 담양의 옛 지명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자로 秋子兮(추자혜, 혜는 고을을 뜻하는 흘로도 읽을 수 있다)로 쓰였다는 사실에서 바탕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첫째 담양(潭陽)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갓골’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秋는 그 훈(訓)이 ‘가을’로 옛 발음은 갈, 가슬, 가실이다. 지금도 우리네 어머니들은 “지난 갈ː에 거둔 쌀이요”, “저번 가실에 딴 떨감이 홍시가 되았네”라며 갈ː과 가실, 가을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정확히 따져보면 ‘가실’과 ‘갈’은 문장 속에서 어울려 그때 그때 다르게 쓰이고 ‘가실’은 가슬도 아니고 가실도 아닌 중간 발음으로 쓰이기도 한다.

갓은 “가상에 걸터앉지 마라”, “길 갓테 널려 있더라”, “갓에 빙 둘러 줄을 처 놓았더라”고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갓골에서의 ‘갓’이 가을을 뜻하는 갓인지 가장자리의 갓인지는 그 발음이 비슷해 명확히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선조들이 한자가 들어오기 전 순우리말로 이 지역을 ‘가실골’이나 ‘갓골’ 또는 ‘가사골(<대한민국행정지명>-윤여정)’로 불렀으리라 유추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유력한 추측은 ‘갓골’이다. 특별히 가을을 뜻하는 가실이 붙을 이유가 약해 여기서 가실이나 갓은 ‘가장자리’일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자리’가 거론되는 이유는 광주와 인접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와 전라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을 때 맨 가장자리가 되기 때문이라는 설(說)이 있다.

첫 번째 說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어 이를 보면, 비교적 국가적 기록을 남길 기회가 많은 현 광주(光州)의 고위관리들이 담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접경지역인 도동고개(현 광주교도소 뒷산 인근)에서 바라보는데 이때 눈에 들어오는 담양은 금성산을 시작해 추월산, 삼인산, 용구산, 불태산 등이 쭉 이어져 산세가 마치 가장자리를 알리는 테두리를 쳐 놓은 형국이다.

따라서 그 땅의 구분을 산의 정맥에 두고 그 아래 고을을 ‘가장자리에 자리한 고을’이라 해 ‘갓골’로 불렀을 것이란 추측이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그대로 훈을 빌려 한자로 쓴 것이 秋子兮이며(갓→秋, 子는 특별한 의미 없이 뒤에 따르는 말, 兮는 고을) 신라시대에 중국식 관제 城이 붙어 秋城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초기까지 추성(秋城, 秋成)이라 쓰였으며 고려 제6대 성종 14년(995)에 담주(潭州)가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이때 담(潭)의 옛 훈이 ‘갓’(현재는 연못을 이르는 ‘못’)이기 때문에 그 한자를 가져다 썼으며 이는 ‘고서현일운추자혜(皐西縣一云秋子兮: 고서현은 추자혜라 이른다)’라는 기록에서 더욱 명확해 진다. 여기서 ‘고서’는 ‘곳’의 음차이고 이는 ‘갓’일 것이란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고서현→갓골)

학자들이 주장하는 담양의 어원 두 번째 해석은 ‘갓잣골’이다.

처음 해석은 秋子兮에서 子를 단순한 어미로만 보는데 여기서는 갓과 골 사이의 子에 그 뜻인 ‘잣’을 넣는다.(갓+잣+골) 이를 보면 ‘갓(갇)’은 본래 ‘물(水)’을 뜻하고 ‘잣(잗)’은 ‘산(山)’을 뜻하는 옛말이므로 ‘물가의 산’이 된다. 발음은 순화되어 ‘가삿골’로 됐으리라.

갓(갇)이 물을 뜻하는 대표적 예는 ‘갈암’(가람, 강)에서 찾을 수 있다. 갓(갇)은 연구개음화되어 ‘갈’로 그 음이 바뀌었는데 여기서 ‘갈대’, ‘갈풀’ 등이 나왔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해석을 종합하면 담양의 순우리말은 ‘갓골’이었을 확률이 높다. ‘갓골’은 한자식 표기로 秋子兮와 秋城을 거쳐 담양(潭陽)이 됐는데 이때 담양을 ‘못골’로 풀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못’은 나중의 발음이고 가을, 물水, 물가, 가장자리의 뜻을 가진 ‘갓’이 그 본래 발음이기 때문이다. 양(陽)은 다른 고을에서도 흔히 나타나듯 ‘고을’을 뜻한다.

부르는 이름이 주문이 되듯 현세에 이르러 담양에는 ‘물=못=갇(갓)’의 영향을 받아 큰 호수(담양호, 광주호)가 둘이나 생겼다. 옛 선현들이 이를 미리 알아 이름을 지었는지 아니면 진짜 주문이 되어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나 1개 郡에 2개의 댐이 있는 사례는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튼 ‘갓골’이란 이름을 지역주체적 시각으로 해석하면 ‘갓골’은 우리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강력한 지방 군사세력이나 정치세력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씁쓸함이 남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이 바라볼 때 스스로 갓 즉, 가장자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갓골’보다 ‘갓삿골(가삿골)’에 한 표 던진다. 나 역시 수천년 전 이곳에 살았다면 우리 사는 이곳이 물과 산이 많아 ‘갓삿골(가삿골)’이라 불렀으리라.


▨ 우리 사는 이때 치욕을 남기다

고려 제6대 성종 14년(955)에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을 강남도(江南道), 전라남도를 해양도(海洋道)라 하였다. 이후 두 지역을 합해 대표고을인 전주(全州)의 全자와 나주(羅州)의 羅자를 따 전라도라 칭하는데 이때가 1018년 고려 현종 9년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지역 편제가 개편됨에 따라 우리 지역 명칭도 따라 바뀌었는데 이 시기-고려 성종 14년-에 ‘潭’자가 처음 나타났으며 ‘潭陽’이 처음 쓰인 시기 또한 고려 현종 9년의 일이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까지 내려와 담양은 호남(湖南) 57관(官, 현재의 시·군과 유사) 중 하나가 됐으니 57관은 이후 정유재란 피해로 장성과 진원이 합해지며 56관으로 바뀌었다.

호남(湖南)이라는 말이 흔히 나오는 시기는 조선 초기를 지나서이며 아마도 現 금강의 별칭이 湖江이었으므로 금강 이남을 호남이라 불렀으리라 추측된다.

또 호남은 좌도와 우도로 나뉘기도 했는데 방위와 다르게 동쪽을 좌도, 서쪽을 우도라 한 이유는 서울에서 왕이 지방을 내려다 볼 때 방위의 동과 서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담양은 곡성, 광양, 화순 등과 더불어 전라좌도(호남좌도) 24관 중 하나로 남원, 장흥, 순천과 함께 4 도호부 중 한 곳이었으며 수령은 종3품 도호부사가 임명됐다. 창평 역시 전라좌도 24관 중 하나로 현(縣)이었으나 종6품 현감이 임명되는 곳보다 커 용담, 능주와 함께 종5품 현령이 임명되는 고을이었다.

도호부는 현재의 市 정도 되는 목(牧)보다는 작으나 그 중요성이 군(郡)보다는 높아 특별히 관리되는 지역이다.

강상(綱常)의 법도를 중요시 한 조선시대에는 반역이나 불효 등이 발생했을 때 죄를 저지른 죄인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출생지나 그와 관련된 고을을 강등하거나 인근 고을에 통합해 버리는 엄벌을 처했는데 대게 10년 정도 지나면 원래로 복귀됐다.

대표적으로 인조 23년(1645년)에 나주목 향리가 나주목사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해 나주목이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되고 이에 전라도가 전주와 남원을 뜻하는 전남도가 된 적이 있으나 10년이 지난 효종 5년(1654년)에 다시 승격돼 전라도로 복호됐다.

담양은 조선시대 역적 이구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창평은 고을사람이 현령을 욕보인 일이 있어 강등됐다 복호된 적 있다. 이에 반해 국사 조구의 태생지라 하여 태조 4년(1395년)에 현에서 군으로 승격됐다가 다시 정종 1년(1398년)에는 왕비 김씨의 외향이라 하여 부로 승격됐으며 태종 13년(1413년)에는 예규에 따라 도호부가 됐다.

이렇듯 기록을 확인해 보면 담양 수천 년 역사상 수령이 비리를 저질러 투옥된 적은 없다. 특히 一家가 사건에 연루돼 사법처리된 적은 더더욱 없다. 우리 사는 이때 ‘빨간줄’을 남겼으니 천추를 두고 후세에 치욕을 남기게 됐다.

혹자는 고려 원율현(현 금성면 원율리 일대)사람 이연년의 반란이나 조선시대 담양좌수 이홍범의 역모를 말하기도 하겠으나 뇌물비리와 반란은 그 차원이 다르다. 특히 백제부흥을 표방하고 7년간 새 세상을 꿈꿨던 이연년이 듣는다면 땅속에서 일어날 일이다.

관선도 아닌 민선자치시대에 우리 손으로 뽑은 고을 수장이 부정부패로 낙마해 수치스러움을 남겼으니 이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때이다.

기록이 남아있는 2천여년 전 역사시대 이후 담양은 추자혜군(秋子兮郡), 굴지현(屈支縣), 율지현(栗支縣)이 타 고을에 영속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독립적으로 영위했으며, 단 한 차례 1232년 이연년의 백제부흥운동으로 폐현된 적이 있다.

그런데 한 단체가 나서 광주와 담양을 통합하자고 운동을 펼치고 있으니 담양이 영속되어 광주에 속하게 될지 흥미로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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