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베버리힐스 창평

조선의 베버리힐스 창평

지난 주 첫 회에 이어 이번 주에는 창평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담양군을 이루는 큰 획으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창평은 가히 ‘조선시대 베버리힐스’라 할 수 있으리라. 요즘으로 말하면 서울의 청담동 정도는 되고 남을 것을.
돈 꾀나 있고 책상받이 좀 한 선량들이 이상향을 꿈꾸던 창평. 선비의 나라에서 선비들이 모여 선비들만의 정신세계를 꿈꾸던 그 곳 창평이 이제는 아스라이 사라져 버렸으니 월봉산의 산울음이 길기만 하다.
무식한 관리들이 “댐이 중요하다”고 “댐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며 ‘광주호’를 만드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몰돼 버렸으니 그 정취, 그 정신은 간데 없고 이제는 ‘슬로시티’라 한다.
한 때 한 나라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던 첨단의 교육도시가 낙후되고 뒤에 밀려 있다가 이제는 옛 것이 그대로 남아 ‘슬로시티’라 한다하니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할 수 없을뿐더러 역사의 수레바퀴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다.

창(昌)은 ‘큰’ 평(平)은 ‘고을’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이었는데 지금의 무정면 봉안리 일대를 술지현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 담양이나 창평을 뭐라 불렀는지 기록은 없고 백제시대에 들어서서 3개 고을 이름이 제대로 나온다.
이를 보면 지금의 담양읍과 무정면 일대는 추자혜군, 금성면 일대는 율지현, 고서면과 창편면 일대는 굴지현이라 했다. 이처럼 굴지현이라는 창평의 옛 지명은 백제시대의 것부터 알 수 있다.
삼국시대가 지나고 통일신라시대가 되어 경덕왕이 나라 편제를 개편하는데 이때 추자혜군을 추성군으로 바꿔 율지현이 바뀐 율원현(금성면)과 과지현(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일대)을 거느리게 하고, 굴지현을 기양현으로 바꾸어 무주(현 광주광역시)의 관할로 두었다.
고려시대에 와서 새나라 개창 이후 나라를 정비하는데 이때가 태조23년 940년의 일이다. 이때 추성군은 그대로 이름을 유지하나 기양현이 창평현으로 바뀌었다.
창평은 이처럼 굴지(屈支)라 하다 기양(祈陽)으로 고치고 일명 명평(鳴平) 또는 창평(昌平)이라 변화해 오는데 이때 ‘屈’은 ‘크다’는 의미를 가진 ‘구루’의 한자 표기로 해석할 수 있다.
구루 > 우루 > 울로 변한 것이 후에 ‘울다’의 뜻을 가진 한자 ‘祈’와 ‘鳴’을 빌어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支)와 양(陽) 다른 지역의 예처럼 고을(골)을 의미하는 한자이다.
기양현이 창평현으로 바뀔 때 율원현이 원율현으로 바뀌고 추성군과 창평현, 원율현을 무주의 관할로 두었으나 얼마 가지 못 하고 15년 뒤인 성종 14년 995년에 다시 추성군을 담주로 고치고 도단련사를 두었다.
이후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무신정권이 일어서기 전까지는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한 개편이 지속됐다. 현종 9년 1018년에 추성군이 담양으로 개명돼 이때 담양이란 이름이 처음 나오게 되고 인종 21년 1144년에는 창평현에 중앙에서 현령이 파견됐다.
그런데 이 중앙정부 관리 파견에 많은 의미가 있다.
<담양의 역사와 문화(2001년 담양군 문화관광과)>를 보면 “1144년 창평에 중앙치정관인 현령이 파견된다”라고 한 후 “당시 창평현의 아전 탁자보가 남적(南賊)을 막은 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남적’이라 기록 때문에 많은 혼란이 온다.
남적(南賊)이라는 단어는 당시 고려의 수도 개경 이남의 농민봉기 가운데 일부를 남적이라 하고 있으며 그 연원은 다음과 같다.
1170년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무신들이 정권을 잡자 각 지방의 토호세력들은 토호세력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봉기와 반란을 일으켜 전국이 들끓었다. 1174년 서경지역에서 조위총(趙位寵) 봉기가 진압되는데 1177~79년까지 계속 활동한 그 남은 무리(餘衆, 혹은 遺種)를 서적(西賊)이라 하였다.
이때 이 서적에 대비돼 쓰인 용어가 남적(南賊)이므로 전국에서 봉기된 반란세력을 지역별 방위로써 구분한 것이 ‘남적’과 ‘서적’이다. 그런데 남적은 서적이 나온 1174년 이후에 쓰이기 시작하였으므로 “1144년 남적을 진압했다”는 점에서 혼란이 발생한다.
남적(南賊)으로 표현된 당시의 농민봉기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이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175년 8월 중앙관인 승선(承宣) 송지인(宋智仁) 등이 남적 석령사(石令史)와 함께 봉기를 폐하고자 했다는 기록이다. 또한 같은 해 11월 문신들이 남적과 모란(謨亂)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1176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봉기와, 같은 해 가야산(伽耶山) 일대에서 전개된 손청(孫淸)의 봉기를 당시 기록에서는 남적이라 했다. 또한 1193년(명종 23)에서 이듬해까지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대규모 농민봉기 가운데 그 주모자인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 그리고 득보(得甫)를 모두 남적의 괴수(南賊魁)라 한 것으로 보아, 이때 일어난 이 지역 일대의 농민봉기를 남적이라 했다.
한편 남적에서의 ‘적(賊)’은 이 지역 금성에서 발생한 ‘이연년의 난’과도 상당한 관계를 갖고 있다. 무신정권 시절 1232년(고종 19년)에 원율현에서 반란이 나는데 그 우두머리였던 이연년은 스스로를 ‘백적도원수(百賊都元帥)’라 칭했다. 이때 백제인의 반란 무리라는 의미로 백적(百賊다)이 들어간다.
백제부흥을 봉기 명분으로 내세운 그는 상당한 세력을 얻어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까지 모두 점령했으나 1237년 나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전라도지휘사 김경손(金慶孫)에 의해 진압됐다.
아무튼 창평은 1144년 이전에는 중앙정부와는 별개로 토호세력에 의한 지배가 강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으며 농민봉기나 이와 유사한 사건이 진압되면서 정부관리가 파견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연년의 난이 진압되고 반란의 중심이었던 원율현은 폐현되고 이 지역에는 창평현과 담양군만 남게 됐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속되다 창평현에 속해있던 갑향(甲鄕)이 담양부에 합해졌다. 1474년 성종 5년 창평현 사람으로 전의감 판감을 지낸 강구연이 현령인 전순도를 능욕한 일이 발생해 혁파된 적이 있었으나 1478년 5년 만에 다시 현으로 복귀됐다.

창평과 담양의 결합

창평과 담양이 합해진 것의 시초는 창평현에 속해 있던 특수행정구역인 갑향(甲鄕)이 1435년 담양부에 합해진 것이다. 정조 17년 1793년에는 창평현의 치소가 고산(현 고서면 고읍)에서 삼지천리(현 창편면 창평리)로 옮겨가는데 고읍리는 아직까지도 옛 창평현의 치소터였다는 뜻을 간직한 채 ‘고읍’으로 불리고 있다.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를 보면 담양도호부는 20개면 5688호, 18270구(口), 245개리로 편제돼 있으며 창평현은 10개면(현내면縣內面, 동면東面, 내남면內南面, 외남면外南面, 서면西面, 북면北面, 장남면 長南面, 동서면東西面, 장북면長北面, 갑향면甲鄕面) 2041호, 7600구(구), 103개리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압승으로 끝나는 등 국제적 혼란시기에 고종은 조선 개국 504년 동안 지속되던 8도제를 1895년 23부제로 바꿨다. 이때 담양군과 창평군은 남원부 관할이 되는데 쇄신차원의 개편에도 불구하고 결국 1년 만에 다시 종전 8도를 위아래로 나눠 13도제를 시행했다. 이때 담양군과 창평군은 다시 전라남도의 관할에 들고 담양군은 2등군, 창평군은 4등군이 된다.
1908년에는 담양군의 덕면(德面), 가면(加面), 대면(大面)과 옥과군이 창평군에 합해지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 시대로 접어든 1914년 4월 1일(조선총독부령 제98호 1913년 12월 29일 공포) 현재의 행정구역이 정해져 옥과군은 다시 곡성군으로 편입되고 창평군은 창평면이 되어 담양에 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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