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환(본지 편집자문위원)

올해로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27년째다. 나의 아버님은 유난히 유가(儒家)적인 색채가 짙으신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님은 나와 두 살 터울의 동생에게 방학이면 의례히 천자문을 가리키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님 곁에는 늘 비사리나무의 회초리가 놓여있었다.

그 회초리의 용도는 이렇다. 동생과 내가 하루에 한자 20자씩 알아야 했고, 배운 것을 매일 연이어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써야했는데 이때 틀리면 틀린 숫자만큼 장단지에 빨간 선형이 생기도록 호되게 맞아야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공부하지 않는다고 때때로 매를 든 건 말할 것도 없고 도리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매를 들었다.

물론 아버님이 이처럼 우리에게 혹독하게 대하신 까닭은 깊은 애정 속에서 인격의 완성과 공부를 하라는 뜻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끝내 학창시절에 스스로 공부한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 모양이었으니 학창시절 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는지 나는 그때 목표와 비전을 왜 갖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많다.

차치하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지금은 가장이된 나도 아버님처럼 틈만 나면 자식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연발하곤 한다. 더러는 간절함으로 설득도 하고 또 때로는 공부를 안하면 미래가 없다는 겁박 아닌 겁박까지 하면서...

남들 부모처럼 잘 먹이고 잘 입히지 못한 못난 아버지로서 이럴 땐 왜 안타까움이 없겠는가마는 그러나 어찌하랴!

대개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더 많은 교육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더 많은 돈을 벌 가능성이 클 뿐 만 아니라 미래의 좋은 직장과 명예, 그리고 사회적으로 상류층 신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짐이 현실인 것을...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물어볼 것도 없이 “공부 좀 해라”일 것이며 만약 우리 부모들에게 삶의 걱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 자식 걱정이 우선일 것이다.

이래저래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들 때문에 늘 데이모스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이 변하듯이 이제는 예전처럼 공부 잘하면 성공이라는 등식은 절대적 조건은 아닌 것 같다.

그 타고난 재능에 더하여 부모의 격려와 끊임없는 관심, 그리고 경제적 지원까지 뒤따라야 한다. 다시 말해 공부할 수 있는 환경과 좋은 학원이나 스승, 그리고 진로에 걸맞는 프로그램이나 특별한 종류의 배경, 여기에 더 나아가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성장했느냐하는 조건까지를 갖출 때 크게 성공 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개천에서는 용이 나오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세상일은 생각하는 대로 될 뿐만 아니라 마음먹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성공의 또 다른 일면은 이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든 성공은 스스로 인생을 절제함으로써 이룩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네 부모님들이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모두 다 참고 절제함으로써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리를 잘 키워 냈듯이 온갖 욕망과 유혹으로부터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또 다른 성공의 첩경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식에게 물려줄 특별한 유산이 없다면 근검절약 할 줄 아는 지혜라도 물려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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