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끼워맞추기’ 후세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 있지도 않은 ‘추성관’ 어떻게 옮기나

담양동초등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곧 바로 강당을 마주하는데 그 건물 이름이 바로 ‘추성관’이다. 2007년 담양동초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건물을 정비하던 중 강당 이름이 없자 이 학교 출신 향토사학자 A씨가 나서 “이 곳은 추성관이 있던 자리니 강당 이름을 추성관이라고 하자”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담양군은 2007년 11월 某씨 문중 제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소위 ‘추성관’을 매입했다. 당시 담당자는 “제봉 고경명 선생 창의기념사업 건축물로 월산면 화방리에 있는 추성관을 매입해 옮기자는 의견이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있었으며 소유주인 某 문중과 마침 매입가가 절충돼 감정평가법인의 감정을 거쳐 1천만원의 가격으로 매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절차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스며있다. 바로 ‘추성관 존재 여부’에 대한 확인절차다. 추성관을 ‘공지의 사실(公知의 事實)’로 여기고 추성관 자체에 대해 어떠한 고증도 거치지 않은 과오를 남겼다.
실제 매입 당시 담양군 자료를 보면 추성‘각’과 추성‘관’을 혼용하며 감정평가 관련서류나 매입관련 서류에는 추성‘각’으로, 某 문중에 보낸 문서에는 추성‘관’으로 쓰고 있다.
2007년 당시에도 ‘추성관’ 존재여부와 역사상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요구는 있었다. 그러나 담양군은 아무런 대응이 없었으며 더욱이 건물을 매입한 이후에는 ‘추성관’으로 명칭을 고정해 역사적으로 불명확한 ‘추성관’ 존재여부를 의도적으로 덮은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왜곡은 담양군 용역으로 발간된 ‘담양부관아 전통역사관광개발 기본계획’에 의해 더욱 명확해 진다.
이 기본계획은 이미 2005년 7월 담양군에 보고됐다. 이에 의하면 ‘추성관’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으며 추성각과 혼동됐을 가능성도 없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담양군은 사가(私家)의 제각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역사적 증명도 없이 매입해 혈세를 낭비한데다 의병 창의사업과 연관시킴으로써 역사 왜곡에 앞장선 책임을 져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이 추성관이라 주장되는 건물이 “담양동초등학교 강당 자리에 있던 건물을 매입해 월산면으로 이전했다”는 매입당사자의 직접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 담양읍사무소 자리에 있던 추성각과 의도적으로 혼용함으로써 ‘역사 끼워맞추기’를 했다는 비판 또한 감수해야 한다.

'전라도지도 담양부' 1872년 제작된 이 고지도에는 '추성관'이 없다. 추성관이 그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추성지'나 위 지도 어느 곳에서라도 그 흔적을 나타내야 한다.

'추성지'는 1758년 이석희 담양도호부사가 편찬한 책으로 요즘의 '담양통계연보'라 할 수 있다. 이 책 관우 부분을 보면 衙舍(요즘의 군청과 비슷)에 대해 정유재란(1597) 후 5년 만인 1602년(선조35년) 이건 부사 때 다시 짓고 또 다시 62년 후인 1664년(현종 때) 신경진 부사가 중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客舍는 정유재란 10년 후인 1607년 김이 부사 때 동상헌을 다시 지은 것을 시작으로 1610년 이안눌 부사가 중대청과 서상헌을 짓고 3년 후인 1611년 윤효전 부사가 동상헌과 중대청의 조식(건물을 꾸미는 단청 등의 일)마쳤으며 1613년 정광적 부사 때 서상헌을 수장(修莊: 조식과 유사한 일)했다하여 7년 동안의 객사 중건기록을 남기고 있다.
'추성지'가 갖는 의의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적어도 1602년부터 1785년까지 185년 동안의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 추성각은 추성관이 아니다

문제는 이해를 돕기 위한 국역이 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역이 제봉 선생의 창의와 관련 담양의 옛 이름인 추성(秋成)을 추성관(秋成館)으로 쓰고 있다. 2004년 담양군이 발행한 <義鄕의 고장, 담양> 26쪽을 보면 “고경명 의병이 담양 추성관에서 창의함으로써”라고 쓰고 이에 대한 근거로 각주를 달아 <은봉전서隱峯全書 與延平李相公貴別紙>에서 발췌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연평이상공귀별지-연평 상공 이귀에게 보낸 별지’-에는 제봉 고경명의 막내아들 용후가 뇌물죄로 사형을 언도 받고 구금돼 집행을 기다리고 있으나 제봉과 그의 형 종후, 인후를 보아 금고형으로 형을 감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 대목에서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은 제봉 고경명이 의병 봉기에 앞장선 데서 연유하니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이 있을 뿐 ‘추성관’에서 집결했다는 내용은 없다.
또 19세기에 들어와 저술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봉연보’ 국역에도 문제가 있다. 국역판을 보면 “公이 秋成館에서 壇을 베풀고”라고 쓰고 있으나 이 역시 원본에는 ‘秋成館’이 나와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추성관’이 없었다는 점은 ‘추성지秋成誌’에서 확연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끝나고 약 150여년이 지난 1756년 담양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이석희李錫禧(1756.4.~1759.4.)는 읍지인 여지지輿地誌 등을 참고해 편찬했음을 밝히며 오늘날 ‘담양통계연보’라 할 수 있는 ‘추성지’(1758)를 제작했다.
이를 보면 담양의 경계와 관원, 성씨, 토산 등 17개 분야를 상술하고 있으며 특히 郡名에서 삼국시대(秋子兮-갓골)와 신라시대(秋成), 고려시대(潭州)의 명칭을 밝힘으로써 담양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관우館宇 분야에서는 아사衙舍와 객사客舍, 동헌東軒, 순고당淳古堂 등에 대해 누가, 언제, 어떻게 창건하고 중수했음을 자세히 밝히고 특히 객사 부분에서는 객사를 중수하며 쓴 이석희 부사의 중수기重修記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를 보면 동헌과 서헌 즉 衙舍 건물은 정유재란이 끝나고 5년 만인 1602년 이간 부사가 다시 지었다는 사실과, 객사는 정유재란이 끝나고 10년 후인 1607년부터 7년에 걸쳐 다시 지어졌다는 내력을 밝히고 있다.
이어, 이처럼 다시 중수됐으나 1717년 홍수로 담양읍이 피해를 입어 60~70호에 이르는 양민이 매몰됐으며 여러 亭觀이 무너져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7년 후(1724년) 심계현 부사 때 여러 청사를 보수했으나 몇 해 가지 못 해 직원들이 숙직도 못할 정도여서 본인 부임 후 재목과 기와 4만여장, 목수들을 구해 4개월에 걸쳐 보수한 끝에 관館 세 채 45칸과 문간방 23칸을 연인원 1000명을 동원해 옛 모습을 찾았다고 쓰여 있다.
또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다음 문장에서는 (객사를 보수하고) “남은 힘으로 남정 옛 터의 불훤루 기둥 9개를 보수해(이뤄) 부아府衙의 영각으로 삼고 6간 절애당의 지붕을 다시 이고 10간에 이르는 무기고와 추성각 서까래 수개를 보수하니 비용이 쌀 수백 섬이요 1천여 냥으로 큰 소임을 마쳤다 (餘力達不喧樓九楹於南亭舊址爲府衙之鈴閣重葺節愛堂六間及武庫十間曁秋成閣數椽用費數百斛米千餘鏹錢盡鉅役也)라고 밝히고 있으며 보수사업을 관장한 담당 직원과 도편수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추성지를 통해 임란 이전 관아 건물 현황과 전후 건물 복원에 관한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어 이 책에 나타나지 않는 ‘추성관’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또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담양을 그린 고지도 어디에서도 ‘추성관’을 찾을 수 없어 ‘추성관’의 존재는 무엇으로도 고증할 수 없다.
더욱이 혼동했으리라 추정되는 추성‘각’은 동헌을 드나드는 높은 대문건물이어서 현재 추성관이라 불려지는 건물과 그 건축양식이 판이하며 위치 또한 추성각은 현재 담양읍사무소 입구 ‘담양청소년의 집’에 위치했을 것이며 추성‘관’이라 주장되는 건물은 담양동초교 강당 자리에 있었다고 함으로써 그 위치 또한 맞지 않는다.
또 설령 ‘전라도지도 담양부’가 제작된 1872년 이후인 1880년대 후반부터 1910년대 사이 추성관이라는 건물이 실존했다 하더라도 의병이 집결한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時空의 연관이 없으며 더욱이 추성각이 추성관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명지대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담양부관아 개발 기본계획)도 추성관이라고 주장되는 건물에 대해 추성지 이후 관아 중수기록이 전무해 “추정이 불가하다”고 밝히고 1926년 월산면 화방리로 이전하기 전 담양동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했다면 고지도를 통해 장청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함으로써 추성각이나 추성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담양군은 현재 월산면 화방리에 있는 소위 추성관을 해체하고 죽향체험마을 내 ‘임난 한말 기념사업’ 부지에 이전하려는 상태다. /서영준 記者

▲ 담양읍 위성 사진 (출처-인터넷 포털 '다음지도') 아래 지적도와 대비해 필지를 구분짓는 골목길 등이 현재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추성관의 존재 여부가 위치의 혼동과 연계되서는 않된다.

▲ 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제작한 지도. 1910년 경 제작된 지적도에 '전라도지도 담양부'를 대입한 사진이다. 이를 미루어 '전라도지도'가 단순히 그 위치의 대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철저한 비율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관아 등 공공건물을 명확히 명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위 사진의 현재 모습(원 안의 숫자에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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