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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의 중심 객사리(客舍里)

▲ ‘객사터 추정지’ 일제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관청 등을 의도적으로 파괴했다. 담양의 객사도 마찬가지여서 건물을 헐고 가운데로 길을 내버렸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객사 옆 사창터는 요즘도 창고가 많이 자리하고 있으며 창고가 헐린 곳은 ‘승일식당’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존 객사터로 소개된 사진은 객사를 드나드는 쪽문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객사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솟을삼문 자리는 위 사진 원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빨간색 선 안은 객사터 추정지 - 자료출처: 담양부관아 전통역사관광개발 기본계획, 2005. 7, 담양군

지금은 사람들이 그 내력을 많이 알고 있으나 외지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객사’라는 어감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객사(客死)라 하니…, 그럼 객사리(客舍里)에는 여관이나 모텔같은 숙박시설이 없을까?

객사(客舍)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초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객사의 중앙 건물 한 가운데는 왕의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대청 양쪽의 익실(翼室)은 흔히 사신이나 중앙의 관리들이 내려오면 숙소로 사용됐었는데 여기서 ‘손님을 위한 집’ 즉 객사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패는 전(殿: 궁궐)자(字)가 새겨 진 나무패이다. 임금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불경한 것이므로 임금을 사물로 나타내지 못하고 그 대신 ‘임금이 있는 곳’ 즉 전(殿)을 향해 예를 드렸다. (우측사진은 솟을삼문)

직접 임금이 있는 곳은 아니나 임금의 현신 즉 전패가 모셔진 곳이므로 객사는 그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며 일을 보는 아사(衙舍) 즉 동헌(東軒) 보다 격이 높았으며 서울에서 관리가 왕의 교지(敎旨)를 가져오면 수령은 객사로 가서 교지를 받아야 했다.

객사의 구조는 보통 ‘오량(澳凉)구조’라 하여 중앙 대청은 온돌이 없는 ‘서늘한 대청’ 즉 양청(凉廳)이라 한다. 이 양청은 지붕 밑에 방이나 마루가 아닌 판돌을 깐 형태이며, 대청 좌우 익실은 온돌을 깔았는데 이를 오실(奧室)이라 한다.

그러나 오실은 임금의 전패가 놓여 진 양청보다 낮아야 하므로 좌우익 지붕을 양청 지붕 보다 낮은 구조로 했다. 따라서 “깊은, 움푹들어간 오(澳)”자를 써 오실(奧室)이라 하였던 것으로 짐작 간다.
(좌측 사진은 안성객사)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대놓고 침탈을 시작했는데 이때 한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각 고을의 관청을 갖가지 방법으로 없애버렸다. 담양도 이때 대부분의 조선시대 관청 건물이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오량구조’ 가운데 세 칸은 양청으로 전패를 두는 곳 . 좌우측 익실은 마루와 방이 들어가 있다. 현재 남아 있거나 복원된 객사를 보면 대게 위와 같은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 좌우 익헌은 동익헌, 서익헌으로 나누며 양청보다 낮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동익헌은 양의 수로 네 칸으로 방 또한 두 칸이며 서익헌은 음의 수 세 칸에 한 칸 방이다. 정청인 양청은 맞배지붕, 익헌은 팔짝지붕이다.


인터넷을 보면 “소주리, 연탄리, 방광리” 등처럼 ‘웃기는 마을이름’으로 가끔 소개되는 ‘객사리’는 담양 말고도 전주 객사동, 경기 평택 객사동, 제주 객사동 등 여러 곳이 있다.

조선시대 담양군은 20개 面으로 이뤄졌었는데(1789년 호구총수)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의 담양읍 지역도 동변면과 서변면으로 나눠져 있었다.

현재의 객사리는 동변면이었는데 1912년 동변면이 동면으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객내리 등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客內里, 北內里, 北外里, 府中里, 東亭里, 澗洞里, 馬內里, 馬外里, 馬口里, 北右里 각 일부를 합하여 객사리로 정했다.

이처럼 이름 지어진 객사리는 요즘 들어 그 이름을 따라 그렇게 됐는지 몰라도 실제 ‘현대판 객사’라 할 수 있는 담양군청이 들어섰다.

그런데 담양군 관아(官衙)는 담주(潭州)라는 이름이 사용된 고려시대 때부터 아마도 현재 담양읍사무소 자리인 담주리 87번지에 줄곧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에 의해 조선시대 관아가 허물어지고 신식(新式)으로 건물이 지어졌을 때도 처음에는 현 담양읍사무소 자리인 담주리 87번지에 지어졌다.

기록을 보면 “1916년 1월 담양면 담주리 87번지의 1에 171평의 본청사와 부속건물 9동을 건축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군청사는 언제 지어졌을까.
군청사가 ‘담주리 시대’를 끝내고 ‘객사리 99번지’로 옮겨온 때는 국가개발이 한창이던 1969년이다.

군청사(郡廳舍) 기공은 1966년 10월 시작됐다. 당시 기록을 보면 10월 27일 박승규(朴升圭) 국회의원과 김보현(金輔鉉) 전남도지사, 1천여 명의 군민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가졌다고 하며 이상노(李尙魯) 군수가 식사에서 “군청사의 발전된 모습은 조국 근대화를 가져오는 것이며 군민의 전당으로 면모를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김보현 지사는 67년에 경찰서 청사를 신축할 것을 약속했으며 박승규 의원과 鄭湧寅 번영회장, 徐正憲 국민운동위원장의 축사가 있었다고 한다. 기공 당시 담양군청사는 1300여 평의 대지에 건평 267평의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로 세우기로 계획됐으며 총예산은 1022만5000원(국고 700만원 군비 300여만원), 67년 5월 완공 계획이었다.

기공식이 끝난 후에는 풍년을 구가하는 농악대회와 화보전시 및 영화의 밤 등으로 담양이 하루 종일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 청사 준공은 계획보다 1년여 늦어져 1969년 4월에야 준공식을 갖게 됐다. 준공식에는 고재필 국회의원과 김보현 도지사를 비롯 군내 각 기관장과 군민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으며 이철수(李哲洙) 군수와 김 도지사가 축사를 통해 “새로운 청사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담양을 건설하자”고 강조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날에는 청사신축에 공이 많은 김 도지사에게 고 의원의 감사장이 증정됐고 박남칠(朴南七), 이상노 前군수와 金性洙, 徐正憲, 田綺鐵 씨 등에게 李군수의 감사장이 증정됐으며 재건국민운동위원장 서정헌 씨는 李군수에게 감사장을 증정했다.

이렇게 지어진 군청사는 당초 계획보다 822만 4000천원이 늘어난 1844만 9000원의 총공사비를 들여 2층 벽돌철근콘크리트 건물로 건축됐으며 이후 증설을 거듭해 오늘날 본관과 민원동, 신관, 사회단체사무실동이 있다. 또 풀뿌리민주주의 전당인 담양군의회 건물도 함께 있어 명실 공히 담양의 심장을 이루고 있다.

담양군은 현재 담양군조례에 의해 신청사 건립을 위한 기금을 매년 20억원씩 적립해 현재 60억원이 조성됐으며 약 150억원 정도가 적립되면 국가 지원을 받아 300억원 정도의 새 청사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군청사 터는 동으로는 금성산을 바라보고 동남쪽으로는 담양읍의 안산인 남산의 품에 안겨 있다. 남으로는 서석산과 미리산을 향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추월산을, 서쪽으로는 삼인산 천왕봉과 불태산을 바라보고 있어 전국에 몇 안 되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새 청사를 건립한다면 도시의 팽창과 도시공학상 군청 터를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담양군은 정부의 새주소사업에 맞춰 ‘객사리 99번지’보다는 ‘추성로 1391’을 쓰고 있다. /서영준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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