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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 佳山이라네” 고가뫼와 회룡 품은 가산리(佳山里)

▲ 고가뫼 마을 앞 보호수

담양동초교 앞 도로정표에서 서쪽으로 5리 되는 곳에 고가뫼 이정표가 있으니 이 곳이 ‘가산리’다. 이곳은 담양읍 중앙에서 딱 5리 되는 데라 읍에서 봤을 때는 왕십리라 하겠다.

올해 초에는 마을 입구 건너편에 대나무 시장이 들어섰고 몇 해 전부터는 강동호케이크를 비롯해 각종 제조공장이나 창고가 들어서 개발이 한창이다. 또 파 3, 9홀짜리 미니골프장이 들어섰는데 이름이 가산골프랜드다. 이 골프장은 광주와 인접해 찾기가 쉽고 특히 퍼팅연습장으로 좋아 국가대표 골프선수 신지애 씨 등이 자주 찾는 곳이라 한다.

가산리 편을 쓰며 아쉬운 건 며칠 동안 계속된 안개 때문에 가산리 배경을 이루는 산들의 화려한 능선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점이다. 굳이 필로 쓰자면 베토벤이 그려 놓은 음정악표라 할까 아니면 국창 임방울이 꺾어 넘기는 수궁가라고나 할까. 울렁불렁 오르내리는 산능선이야말로 ‘한국의 美’요 ‘담양의 아름다움’이다.

가산리는 1구와 2구가 있는데 1구는 고가뫼(사진 左), 2구는 회룡마을(사진 右)이다. 고가뫼는 내동(內洞)이라고도 하는데 1789년 제작된 호구총수(高駕池面 內洞里)에서도 찾아 볼 수 있어 우리 지역 선조들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마을을 ‘안동’이라 부르고 쓰기는 내동(內洞)이라 썼으리라.

또 회룡마을(생말)은 호구총수에서 高駕池面 생촌(省村)이라 하고 있는데 이때 생촌은 ‘사이의 마을’의 뜻인 ‘샛말’이 ‘샘말’로 되었다가 ‘생말’로 쓴 것으로 보이며 쓰기는 음과 뜻을 각각 빌어 省(살필 성, 덜 생)村이라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안동’이나 ‘생말’은 윗마을이나 아랫마을처럼 그 마을의 정식이름이 아닌 쉽게 부르는 이름이므로 되도록 ‘고가뫼’나 ‘회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게 좋다.

회룡(會龍)마을의 ‘회’자는 곳곳에서 ‘돌 회(回)’자와 ‘모일 회(會)’자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회관 건립비에는 會자를 쓰고 있으나 동네사람 대부분은 “마을을 둘러싼 산이 용이 마을을 품고 돌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回자를 쓴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사람 몇몇이나 <담양고을 땅이름>은 會자 그대로 “용이 모이는 형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가뫼(고가산, 高駕山)는 마을이름이자 뒷산 이름이기도하다. 본래 목산면(木山面)에 속해있던 고가뫼는 잠시 고가지면(高駕池面, 1789년 호구총서)이라고도 했는데 아마도 마을 앞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며 이를 기념해 본래이름 高駕에 못 지(池)자를 삽입한 것이 아닌가하는 짐작을 해본다.

1912년 마을조사를 보면 고가뫼마을은 고면(高面) 내동(內洞)으로, 회룡마을은 고면 회룡동(回龍洞)으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말까지 내동이나 회룡동리란 이름이 이어져 온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고면 내동과 회룡동은 1913년 12월 29일 담양부령 제111호에 의해 월산면(月山面)으로 각각 통합됐으나 이듬해인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다시 이름을 바꿔 가산리 1, 2구로 통합됐다.

가산(佳山)이란 이름은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산’을 뜻하나 본래 고가산이란 이름에서 ‘고’자를 버리고 뒤 두 글자 ‘가산’만 따 가산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이때 수레 가(駕)자를 아름다울 가(佳)자로 한 것 같다.

<담양고을 땅이름>에서는 가산을 ‘가장자리의 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하나 본래 수레를 뜻하는 ‘駕’자를 예부터 계속 써왔고 특별히 고가뫼를 가장자리라 할 이유가 없어 아마도 고가산의 산형(山形)이 수레 모양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고가뫼와 회룡동이 지금처럼 담양읍이 된 것은 1983년 2월 15일이다. (1983년 1월 10일 대통령령 제11027호 공포) 당시 봉산면 江爭里, 무정면 五桂里, 盤龍里, 금성면 錦月里, 三萬里, 鶴洞里, 월산면 雲橋里, 三茶里가 함께 읍으로 편입됐다.

마을회관 건립비는 가산리 입향조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원주(原州)李씨 6世인 경원군 이종호(慶原君 李種豪)가 조선 성종 때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면서 고가산(高駕山) 주변을 두루 살펴본 후 살기가 좋고 많은 인재가 날 것으로 생각해 관직을 퇴임하고 찾아와 샘이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이 처음으로 그 후손이 21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1780년 경에는 풍산홍씨(豊山洪氏)가 입향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가뫼 마을 정자는 그 이름이 高佳亭이며 회룡마을은 舞龍亭이다. 고가뫼 입구에는 옛 리사무소가 남아 그때 추억을 전하는 듯 하며 150여년 된 보호수는 세월의 풍파를 이어나가고 있다.

▲ 고가뫼 마을 입구

▲ 고가뫼 마을 전경

▲ 회룡마을 입구

▲ 회룡마을 전경

▲ 가산1리사무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사무소 앞에는 보호수가 있다.

▲ 가산리 마을회관. 마을회관 건립비와 마을 정자가 보인다.

▲ 마을 앞 당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으며 기괴한 모습을 하고도 세월의 풍상을 이기며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다.

▲ 위는 고가뫼 마을 정자인 고가정, 아래는 회룡마을 정자 무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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