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의 최고봉을 만나는 ‘사대부가의 별원’

1551년(명종 6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환벽당에서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가 별당 아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잠에서 깨어 용소로 내려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그 소년을 만나보니 기상이 좋고 재기가 넘쳐 보였다. 그래서 그를 제자로 삼는다. 그가 바로 송강 정철(1536~1593)이다.

송강 정철. 그는 국문시가의 개척자이다. 우리나라 말의 조형성을 가장 아름답고 감칠맛 나게 표현한 시인이다. 그리고 정철의 고향이기도 한 남도의 땅 창평은 ‘송강 가사 문학’을 탄생시킨 본향이기도 하다.

낙향하며 지은 단아한 정자

왕의 친척마저 숙청한 관료
정치적 인생에 수많은 굴곡 엿보여
낙향한 뒤 정자 지어 집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유신교차로에서 봉산초등학교 양지분교 쪽으로 조금 가다가보면 좌측으로 주차장이 보이고, 숲 위쪽에 자리를 한 송강정이 보인다. 이 정자는 원래는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정철이 지냈다해서 그의 호를 따 ‘송강정’이라고 하였다.

계단을 따라 오르니 솔향이 코를 간질인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어 올라본다. 숨을 들이키자 폐부 한 가득 소나무의 향이 가득 차는 듯하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 날아간다. 계단 위에 자리한 정자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다. 그저 어느 고졸한 학자 한 사람이 이곳에서 쉬어갈 만한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그 유명한 ‘사미인곡’이 지어진 것이라는데 대해, 다신 한번 정자를 훑어본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은 1561년(명종 16년)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사실, 정철의 정치적 인생에 수많은 굴곡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장원급제를 한 뒤 사헌부 지평으로 일했던 정철은 때마침 경양군 사건이 일어난다. 경양군은 처갓집 재산을 빼앗으려고 처남을 죽이고 그 흔적을 없애려고 했는데, 이것이 발각된 것. 명종은 정철에게 사촌형인 경양군을 너그럽게 보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정철은 임금의 부탁을 거절하고 끝내 경양군을 사형에 처했다. 이로 인해 명종은 정철을 찬밥 신세로 만들었다. 그러나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이조좌랑으로 인사 실무책임자가 되는 요직을 맡으면서 다시 승승장구한다.

송강은 벼슬을 하면서 무려 4차례에 걸쳐 낙향하게 된다.
처음 낙향은 1575년,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이 무렵 동서분쟁이 본격화되어 정철은 서인으로서 동인과 대립했는데, 그만 낙향한다. 이때 2년간 창평에 머무르면서 ‘성산별곡’을 지었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두 번째 낙향은 그의 나이 44세 때다. 이후 그는 강원도관찰사 벼슬을 제수받았는 데 ‘관동별곡’의 첫 머리에는 이 당시의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 백리에 방면을 맡기시어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정치적 시련 속 ‘명작’ 남겨

美人으로 의인화한 문장들
곳곳서 임금 사모한 심정 ‘절절’
빼어난 시가, 가사문학의 ‘새 지평’

세 번째 낙향은 그의 나이 46세때 6개월간이었으며, 마지막 낙향은 그의 나이 50세 때인 1585년이다. 당시 대사헌으로 일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등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난 후 서인의 중심 인물이 된 그는 동인의 탄핵을 받아 낙향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문학적으로는 불후의 명작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송강정에는 정철의 시가 현판에 남아 있다.

望松江 (송강을 바라보며)

歇馬坐松根
松江在眼底
幽樓計己定
歲晩吾將去

타고 가던 말 멈춰놓고 솔뿌리에 앉았으니
맑은 송강은 바로 눈 아래에 있네
살아갈 은자의 계책 이미 정했으니
연말 안에는 내 떠나가리

이를 현대문으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나라를 위하여 한참 일하다가 이제 멈추어 잠시 은자로서 살게 되었다. 고향의 송강 물은 눈 아래 있다. 이미 숨어사는 계획도 세워 놓았다. 조금만 조용히 살자. 연말에는 내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리.”

낙향 초기에 지은 시로서, 당시 정철의 자신만만함이 엿보인다.
또 고전 중의 고전으로 일컫는 ‘사미인곡’은 제목 그대로 미인(美人)을 사모하는 곡이다. 정철의 입장에서는 미인이란 선조 임금을 가리킨다. 이렇듯 사미인곡은 창평에 낙향한 정철이 한양에 계신 선조 임금을 사모하는 심정을 한 여인의 목소리로 읊은 사모곡이다.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고 홀로 사는 여인이 임을 그리워하는 노래인 것이다.

思美人曲 (사미인곡)

이 몸 삼기실 제 님을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노여 업다
평생에 원하요대 한데 녜자 하였더니
늙거사 므삼 일로 외오 두고 그리는고
엊그제 임을 모셔 광한전에 올랐더니
그 더대 어찌하여 하계(下界)에 내려오니
올 적에 빗은 머리 얽힌 지 삼(三)년이라

정철은 선조 임금과 천생연분이라서 평생 임금을 모시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는데 나이 들어 임금과 이별하여 홀로 천리 밖 창평에 있으며, 임금과 떨어져 지낸 지가 3년이라고 읊고 있다.

(중략)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져근덧 생각마라 이 시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골수에 사무치니
편작이 열이 오나 이 병을 어찌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싀어디여 범나비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데 족족 안니다가
향 묻은 날애로 임의 옷에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줄 모르셔도 내 임 조츠러 하노라

사미인곡 가사는 ‘님이야 날인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라고 끝맺고 있다.
임이 나를 알지 못하여도, 임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임이 나를 안 찾아와도 나는 내 님을 영원히 좇으리라. 그야말로 임을 향한 일편단심이다. 변함없이 임을 사랑하는 마음. 이 마음이 정철이 선조 임금에 대한 충성이요, ‘일편단심 연군지정’이리라.

이렇듯,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고 절절하게 담아내는 그의 문장에 대해 김만중 등 많은 평자들에 의해 찬사를 받았으며, 조선시대 사대부 가사문학의 최고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사대부들 간에는 우리말글인 한글이 천시되었던 시절에, 그는 일상의 언어인 우리말로 사모곡을 지었으니, 왜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의 제1인자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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