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의 글을 쓰던지 글을 쓴다는 사실에 몇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을법하다. 특히 불특정다수인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이나 온라인 선상에 게재될 내용이라면 이는 더더욱 특별한 주의가 요구 된다 할 것이다.

필자는 더러 기고문을 작성하면서 스스로 어불성설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 글을 써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먼저 나 자신의 무식은 차치하고라도 기고를 한다는 것은 독자들의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기고문을 읽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독자들은 내 기고문에 대하여 자신의 주관 속에서 가치판단을 할 것이고, 다음은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의 삶과 그 기고문에 견주어 나를 바라볼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것이 두려웠다.

내가 쓴 글과 나의 행태에 혹여 어떤 괴리는 없는지, 스스로 당당할 수 있으며 부끄러운 일은 아닌지. 하지만 뒤돌아보면 나의 기고문의 의미와 나의 삶은 모두가 엇박자일 뿐 일치하는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더러 나는 기고문을 회고 하면서 살며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미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까닭이...

요즘 온라인시대의 각 단체 및 기관, 기업들의 고객 또는 관계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전산망이 비교적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다. 이러한 기능을 설치한 목적은 우호적 소통으로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 설득하며, 간단없는 상호 신뢰를 증진시켜 나가자는 데 그 본질이 있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우리사회 전산망 게시판에는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 주의주장이나 정당성만을 말하려 할 뿐 ,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하기 보다는 비하하고 애써 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칭찬은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는데...

또한 어떤 경전에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그 비판하는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구절이 있는데도 칭찬에는 궁색함이 현실인 것 같다. 어떤 사안을 비판하려면 그 사안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으로 정통하고 있지 않으면 그 비판은 지극히 위험할 수 있다. 더욱 단편적인 지식이나 개인적 감정이 우선한 경우에는 그 위험성은 더할 나위 없다. 이는 대개 감정이 우선하면 이성을 잃기 쉬운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설득하려면 먼저 그 상대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소위 역지사지다. 그러나 역지사지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흔히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입으로 하는 이해일 경우가 많고 진정 가슴으로 하는 이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쉽게 자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람은 대개의 경우 타인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이유보다는 스스로 찾아 낸 이유로 더 잘 납득하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체득된 진리가 아니면 진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논리인 것이다. 더불어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믿고 있는 것이나 처음의 생각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심리적 요인도 여기서는 한 몫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면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우선이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일이 펜의 힘인 촌철살인보다 위에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과거 신을 믿으면서도 그릇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가 다른 신도에게 해가될까 두려워 신앙생활을 접었다. 이것이 나의 나약함인가! 아니면 나의 의지의 부족인가! 결단코 아니다. 그 선택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진실한 사랑이었으며 내 영혼의 양심이었다.

요즘 나이 들어가면서 모범! 언행일치! 절제! 이런 것 들이 나의 무지를 떠나 글쓰기를 두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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