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에 둘러싸인 그윽한 곳

광주호 상류에 자리잡은 환벽당은 빼어난 자연환경과 더불어 호남문학의 꽃을 피운 산실로 불린다. 이는 환벽당의 주인인 김윤제를 중심으로 정철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 학자, 관료들이 교우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광주호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산 자락에 터를 잡고 있는 환벽당에 오르면 사시사철 정자에 머물며 사색과 토론과 문학과 학문을 즐겼던 옛 선비들의 모습을 떠올릴 법하다.


환벽당은 광주호를 지나 소쇄원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지실마을 입구에서 충효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왼편에 있다. 환벽당 위치는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인데, 이 충효교를 사이에 두고 광주광역시와 전남 담양군의 경계를 이룬다.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또한 이 작은 오솔길은 내[川]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온 사촌 김윤제(1501~1572)가 훗날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르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환벽당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 조선시대에서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김윤제 그 자신도 1545년(명종1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나주목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으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의 제자들 중엔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등이 있다.

당시 환벽당에 드나들었던 인물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롭다. 우선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가 그의 처남이고, 호남의 문장가 임억령은 김성원의 장인이다. 또한 그의 처남 양산보와 도학과 절의의 선비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이고, 양산보와 면앙정 송순과는 이종간이어서 이들과 같이 잘 어울렸다 한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 ‘성산별곡’ 중에서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 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1칸이 누마루를 두고, 좌측 2칸이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이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아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전문학에 있어서 강호가도의 선구자이며 ‘면앙정가’를 지은 송순이 환벽당에 대한 시를 썼다.

소나무 아래는 맑은 못, 바위 위에는 정자
정말 맑은 정경이 펼쳐지는 곳 여기가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네
날보고 온 원숭이와 학들이 나를 놀리고 있네
어찌 속된 꿈을 아직 깨지 못하느냐고

송순이 환벽당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표현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 속에서 사는 김윤제의 삶을 은근히 부러워했을까. 아마도 속세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웠을까.
이제 환벽당 앞뜰에 있는 연못과 나무들을 구경하고 나서 환벽당을 내려온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자연석 비에는 정철이 쓴 시가 있다.

釣臺雙松 (조대쌍송)

日?二松下
潭底見遊鱗
終夕不登釣
忘機惟主人

낮엔 두 소나무 아래서 시 읊으며
못 밑에 노니는 고기를 보았네
종일토록 고기는 아니 낚이는데
유독 주인은 세상사를 잊었구나

같은 제목의 임억령의 시도 같이 새겨져 있다.

雨洗石無垢
霜侵松有鱗
此翁唯取適
不是釣周人

빗물에 씻기어 돌에는 때가 없고
서리 맞은 소나무엔 비늘이 끼어 있다
이 늙은이 뜻대로 한가함을 취할 뿐이니
곧은 낚시 드리우던 강태공이 아닌가

이 시를 보면 세상사를 잊고 한가하게 사는 유유자적함이 보인다. 시를 읊고, 못 밑에 노니는 고기를 보니, 절로 시인이 된 느낌이다. 경치에 젖고 시에 젖어 어느덧 내가 조선의 선비가 된 기분이다.

저작권자 © 담양곡성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