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미래와 고뇌가 서린 사림선비의 거처

담양을 찾는 관광객이면 꼭 한번 소쇄원을 찾을만큼 명소가 됐다. 학계에서도 ‘자연과 인공미가 어우러진 조선시대 최고의 건축미학’이라고 치켜세운다. 소쇄원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면 ‘시대정신’을 헤아려볼 수 있다. 굴곡진 삶을 살지언정 꿋꿋한 기개를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도란도란 사람과 자연 등과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지닌 소쇄원을 둘러본다.


‘여보게, 나는 혼탁한 세상이 싫어. 그러니 나는 이만 산 속 깊은 곳에 집 짓고 유유자적하며 생활할까 하네.’

담양에 터를 잡은 이름 모를 선비가 할 법한 말이다. 그 선비는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할 바에야 벼슬이나 당파 싸움에 휩쓸리지 않고 자연에 귀의해 살기를 희망했다.

이렇듯, 소쇄원은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가 여행자의 발길을 안내한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는 좌우로 흔들린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우수수’ 마치 비가 쏟아지는 소리인 듯하다. 모두 한 자리에서 자란 대나무들이지만 그 굵기와 생김새가 서로 다르다. 자연이 이러할진대 어찌 사람이 뜻을 모으기가 쉬울까.

적료(寂廖) 속에 찾고자 했던 세상

담양을 대표하는 원림은 단연 소쇄원이다. 남면 지곡리에 자리 잡은 소쇄원은 보길도의 부용동원림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꼽힌다. 소쇄원은 자연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고, 자연물을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최고의 휴식처다.

소쇄원의 본래 주인은 지금으로부터 480여년 전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살았던 소쇄옹 양산보(1503~1557)라는 선비. 기묘사화(1519년)가 일어나면서 스승 조광조가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17세에 낙향해 소쇄원을 세웠다. 오늘날로 치자면, ‘정치 신인’이 정계에서 은퇴한 셈이다.

중앙정치에 나가지 않고 지방에서 학문을 닦으며 평생을 보낸 양산보 선생. 그는 당시 정치에 대해 느림의 미학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것을 주장하되 과하지 않게, 세상에 천천히 녹아들 수 있도록 말이다.

瀟灑園 (소쇄원)
超然遐遯日
亭沼此經營
水石偏瀟灑
方知不爽名

초연히 멀리 숨어들던 날
정자와 연못의 터를 잡았는데
수석이 몹시 맑고 깨끗하여
이름 더럽히지 않을 줄 알았네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솨아, 하는 소리를 내고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왔다. 짙은 그늘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걱거리는 바람소리 사이로 간간히 물소리가 흘러나오고, 서늘한 공기가 살갗을 건드린다. 숲 안으로 들어온 것일까. 일순 정적이 흐르고 귀가 먹먹해진 것 같다. 발자국 소리와 가느다란 물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료(寂廖)’라는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송시열이 이름을 붙였다는 산책공간인 ‘애양단’이 자리잡고 있다. 홈을 파서 만든 나무로 계곡물을 끌어들이는 연못 등 1400여평의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담장 아래로 흐르는 계류가 넓적한 암반을 다섯 번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오곡문’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물을 보고 지나며
글을 읊으니 생각은 더욱 그윽해
사람들은 진원을 찾아 거슬러 가지도 않고
부질없이 담 구멍에 흐르는 물만을 보네

이렇듯 계류의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성리학의 교훈을 실현한 곳이 바로 오곡문이다. 계곡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는 큰 물도 감히 오곡문을 범하지 못했으니 이는 자연 앞에 군림하지 않고 순응하는 양산보 선생의 미덕이지 않을까.

경계 안에서 경계 밖을 관조하다

오곡문을 바라보며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 매화나무 화단인 ‘매대’를 만난다. 18세기에 제작된 ‘소쇄원도’를 보면 매화를 심어두고 거기를 매대라고 써 넣었다. 아마 그때는 매화나무를 심어두었던 모양이다. ‘소쇄원 48영’에도 “매대에 올라 달을 맞으니(梅臺邀月)”라고 노래한 것처럼 추운 겨울 밤 매화나무 가지 위로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던 장소였을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매대 뒷담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글씨 판이 박혀 있다. 이는 ‘소쇄옹의 조촐한 집’이라는 뜻이다.

매대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면 양지 바른 언덕에 주인이 서재로 쓰던 ‘제월당’이 나타난다.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은 주인의 성품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풍류가 녹아 있는데, 이곳에선 정원 전체가 한 눈에 볼 수 있다.

霽月堂 (제월당)
欲觀虛白界
?坐澗邊堂
一樣靑天月
偏燐霽後光

텅 비고 하얀 세계를 보려면
시냇가 이 집에 앉아야만 하네
온통 푸른 하늘에 걸린 저 달도
비 갠 뒤의 달빛은 더욱 어여뻐

제월당 협문을 나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녹음 속에 숨은 ‘광풍각’이 고색창연한 모습을 드러낸다. ‘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의미의 광풍각은 주인이 소쇄원을 찾은 벗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개방된 공간이다. 한마디로 사랑방인 셈이다.

선생은 아마도 이곳에서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를 바라보며 선비의 지조를 되새겼을 게다. 그리고 사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정원수들을 바라보며 세월의 변화무쌍함을 느꼈을 것이다.

石老雲烟濕
蒼蒼蘚作花
一般丘壑性
絶意向繁華

바윗돌 오랠수록 구름 안개에 젖어
푸르고 푸르러 이끼 꽃을 이루네
흔히 구학을 즐기는 은자들의 본성은
번화함에는 전연 뜻을 두지 않는다네

결구에 이르러 “속세의 번화함에는 전연 뜻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부귀공명은 아예 탐하지 않고 어지러운 속세를 멀리하겠다는 양산보 선생의 은유적 심정을 읽어낼 수 있다. 또 ‘푸른 이끼’는 아마도 깨어있는 조선의 선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양산보 선생은 이곳을 먼지 하나,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곳, 즉 ‘소쇄(瀟灑)’한 곳으로 만들고자 입구에 대나무 숲을 두어 세속과의 경계로 삼았다.

현실 정치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지켜봐야 했던 선생의 태도는 학자로서의 조용한 후퇴와 관조,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순응 등 이 모든 것이 ‘은둔’이라는 보수적인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참되게 세상을 관조하겠다는 진보적인 선비의 모습이지 않을까.

경계(담) 밖의 세상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경계(담) 안의 나를 겸허히 다스리고자 할 때, 눈 앞에 켜진 촛불의 진정한 밝음을 볼 것이며, 그럴 때에만 그런 시대를 다스려 가야 할 지배자로서의 참된 논리가 서지 않겠는가? 소쇄원에서 참 선비의 길을 뒤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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