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준 記者


담양부사를 지냈던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은 유자(儒者)이면서도 서산대사 휴정과 교류가 깊었다. 낙산사에서 함께 지내던 둘은 이내 헤어지고 석천이 송별시를 지었음에 전해오고 있다.

“岩松元自曲 바위 옆 솔은 원래 절로 굽어지고 水月不成圓 물에 뜬 달은 둥글 수가 없는 법 他日師如訪 훗날 대사가 찾아올 때에는 眉岩雪竹邊 예쁜 바위 가에 설죽이 한창일걸세.”

달관한 세상 이치를 읊으며 미암 유희춘과의 만남을 예고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듯 굽고 일그러지는 게 세리(世理)라 石川은 그리 말하였던가.

고지도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동헌으로만 표기되던 담양부 동헌에 명칭이 나온다. 고지도 제작 연대는 1758~1793년 사이로 추정되며 동헌 이름은 춘생헌(春生軒)으로 보인다.

‘춘생(春生)’은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단어로 그 글귀를 보면 이러하다.
“學者要有段兢業的心思 학문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일단 조심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하나 又要有段瀟灑的趣味 마찬가지로 시원스럽고 산뜻한 맛도 있어야 한다. 若一味儉束淸苦 만약 한 가지에 얽매여 결백하기만 하려한다면 是有秋殺無春生 이는 가을의 살기만 있고 봄의 생기가 없음이니 何以發育萬物 어찌 만물을 기를 수 있겠는가.”

자성 홍응명(自誠 洪應明)이 쓴 채근담은 명나라 말에 나왔으니 조선에서 1700년대 말에서야 ‘春生’이란 말이 쓰인 건 당연하다.

어찌했든 요즘 해석은 학자가 자신의 주장에만 얽매이지 말고 두루 포섭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나 ‘春生軒에서의 春生’은 이렇게 생각해 본다.

‘반상(班常)의 사회구조에서 힘없는 백성을 위해 가혹한 법집행 보단 그 이면을 살펴 아픔을 알고 처벌하기보다 되도록 교화에 힘써 봄날 생기 돌듯 할 것이며, 더불어 담양이 따뜻한 봄날 만물이 생동하는 듯한 고을이 되기를 비는 마음을 담아 동헌 이름을 ‘春生軒’이라 하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이다.

마침 춘생헌이란 이름이 보이는 때는 이석희(李錫禧) 부사가 역임한 때로 李부사는 객사와 불훤루 등을 중수하고 추성지(秋成誌)를 편찬한 이여서 ‘춘생헌이란 이름은 바로 이석희 부사가 짓지 않았나’ 하고 짐작해 본다.

秋成誌는 삼한시대 이래 담양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읍지형식으로 편찬한 책으로 담양으로선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책이다. 그런데 이 추성지에는 ‘추성관’이란 건물명이 없다. 물론 다른 건물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후세들은 ‘추성관’을 찾았다 하고 그것을 사서 의병기념관에 복원했다고 하며 그 와중 某문중은 장학금을 기탁했다 하니 필귀곡이다.

석천이 바위 옆 소나무는 굽는 게 당연하고 물 위의 뜬 달은 둥글 수가 없다하나 이는 사람의 가녀린 마음을 표현한 것이요, 홍자성이 한 가지에만 얽매여 결백하기만 하려 한하면 봄기운이 없다한 것은 관리에게는 애민정신을, 학자에게는 열린 마음을 주문한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하니 역사왜곡은 물 위의 일그러진 달도 봄기운과도 상관없다. 담양군은 이번 일을 교훈삼아 역사적 고증에 더욱 신중을 기할 것이며 잘 못된 것은 티끌하나 남김없이 정리할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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