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창 순 (前 곡성중앙초등학교 교사)

박대업 상쇠의 구성진 쇠가락과 농악단원들의 일사불란한 몸놀림은 마당을 빙 둘러선 관중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난 가을 심청축제 때, 기차마을 놀이마당에서 열린 제2회 곡성군농악인 한마음대회에서 시연한 도지정무형문화재35호인 죽동농악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그리고 이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곡성읍농악단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첫 번째 신고식을 무사히 마쳤다.

이렇듯 곡성군농악인의 한마당잔치가 심청축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됨으로서 심청축제의 내용을 더해줌과 동시에, 곡성군농악인의 긍지를 살릴 수 있는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되어, 박대업 상쇠와 관계자 여러분의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내 어릴 적, 우리 동네(서편네 6,7구)에선 굿(농악)치는 일이 흔했다. 논에서 김매기를 할 때마다 논두렁이나 신작로 가에서 굿을 쳤고, 성주하고 집들이 할 때는 말 할 것도 없고 마당에 우물만 파도 굿을 치곤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신나는 것은 명절 때 벌어지는 굿판이었다. 그때는 시내에 있는 면사무소까지 오가면서 마당놀이를 펼쳤는데 코흘리개 우리아이들은 어른들 틈에 끼어 굿판을 졸졸 따라다니며 구경을 하곤 했다.

상쇠인 점바우 아버지가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상모위에 채끝(꽃술)을 살포시 들어앉힐 때는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를 했다. 정택이 아버지인 두 째 이센은 나비보다 가볍고 고양이보다 날렵하게 장고를 쳤고. 젊은 형들은 폴딱폴딱 뛰고 돌며 소고를 쳤다. 술도가 짐빠(화물자전거) 한센은 하늘까지 닿을 듯이 크고 무거운 대나무농기를 허리띠에 받쳐 든 채 열심히 흔들어댔으며, 나무총을 어깨에 맨 쌍보 아버지 포수 한센은 참새 몇 마리 허리춤에 꿰어 차고 연신 빈총을 쏘아대며 어깨춤을 추었다.

엿주깽~ 엿주깽~ 꽹과리소리, 줄동말동 줄동말동 장고소리, 줘~라 줘~라 징소리를 추임새로 따라 부르며 어스름한 저녁까지 쫓아다녔던, 아스라이 먼 기억저편의 내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이다.

작년 봄,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던 교직생활을 모교인 곡성중앙초등학교에서 정년퇴직으로 마무리하고 나올 즈음, 곡성읍사무소(읍장 손신환)에서 곡성읍농악단의 창단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곡성읍농악단장이라는 중책을 느닷없이 맡게 되었다. 읍민의 날 행사가 한 달 여밖에 남지 않은 다급한 상황에서 길놀이와 마당놀이 한마당을 한시바삐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하는 수 없이 곧바로 조직을 꾸림과 동시에 학교운동회 때 소고놀이를 가르쳤던 경험을 되살려,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듯이 조금 씩 조금 씩 악보를 만들어, 그것을 연습하고 수정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곡성읍농악단이 태어난 지 겨우 열 달밖에 안된 어린애라서 성숙할 때 까지는 흘려야할 땀과 인내할 세월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그동안에도 주어진 과제는 충실히 이행해왔다. 곡성읍민의 날 행사를 비롯하여 곡성군민의 날 행사, 대평리 공동선별장에서의 멜론 출하식, 어린이날행사, 통일한마당, 여름연수회, 전국농악인 대회, 제2회 곡성군농악인 한마음대회 등, 짧은 기간에 적지 않는 일들을 무난히 소화해 냈기 때문이다.

우리 곡성읍농악단의 운영방침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독창성이다. 새롭게 창단되는 농악단인 만큼, 기존의 타 농악단의 것을 그대로 베끼거나 흉내 내지 않고 우리만의 고유한 색깔과 냄새를 갖는 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좌도농악의 전설적인 상쇠로 남아있는 점바우아버지 기창수 어르신의 좌도가락에다 보고들은 풍월을 보태어 새롭게 구성하였다. 나라마다 언어와 풍습이 다르기에 세계여행 할 맛이 나듯이, 우리농악도 지방마다 마을마다 각자 다른 맛이 있어야한다. 이런 문화의 다양성이 바로 아름다운 문화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일곱 가지 빛깔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며, 밤하늘도 크고 작은 별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다음은 수월성이다. 큰맘을 먹지 않으면 가볼 수 없는 화려한 금강산이기보다는 아무 때라도 오를 수 있는 뒷동산 같은, 고래를 잡는 바다이기보다는 미꾸라지를 잡던 앞 냇가 같은, 그리고 분단장하느라 뜸 들이는 예쁜 춘향이이기보다는 부르기만 하면 맨발로 뛰어나오는 향단이 같이 배우기 쉽고, 대하기 편하고, 부르기 만만한, 그런 농악대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정다움이다. 단원전체가 형제자매처럼 끈끈한 정으로 뭉쳐야 한다, 조직의 성쇠는 결국 사람에게 달렸으며, 우리대원끼리 계모임을 만든 것도 그래서이다.

사람의 일생이 순탄치만은 않은 것처럼, 우리 곡성읍농악단도 미처 뿌리 발을 하기도 전에 외풍에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그 고비를 무난히 극복하고 지금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것 같아 크게 안심이 된다.

이제, 곡성읍 역사상 처음 생긴 곡성읍농악대를 통해 우리고유의 전통음악인 농악한마당을 시시때때로 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곡성읍문화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가 될 것이라 믿음과 동시에 곡성군농악연합회의 든든한 한 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곡성읍농악단의 창단을 주도했던 손신환 전읍장의 조기퇴진은 참으로 아쉽다. 하지만 후임자들 역시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행정지원으로 그 뜻을 배반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끝으로, 뜻을 함께해온 쇠잡이 고장수, 박성래님, 장구잡이 조순옥님, 징잡이 문장석, 김창기님, 북잡이 이윤희님과 마을 책임자이신 노경희, 장순애, 박복자, 오효숙부회장님, 살림을 꾸려 오신 임동섭총무님, 발목을 다쳐 절뚝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오순금, 김선주간사님, 칠십 고령에도 모범적으로 참여하신 박옥희님,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믿고 따라주신 창단멤버 전원과 나중에 합류하신 단원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담당공무원인 김선희님께도 고마움을 표하며, 우리군의 자랑인 박대업 상쇠가 이끄는 죽동농악과 더불어 곡성읍농악이 읍민의 많은 관심과 성원 속에 영원히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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