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창 순 (前 곡성중앙초등학교 교사)

겨울날씨답지 않게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형제봉은 안개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뉴스시간에 적설량과 함께 곡성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눈이 많이 오긴 했나보다. 허긴 첫눈부터 소복하게 쌓이더니 아직도 벌판은 흰 눈으로 덮여있다.

기차마을에 스케이트장이 개설됐다고 하여 자전거를 타고 구경을 갔다. 매표원의 무덤덤한 표정을 뒤로하고 기차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철 비수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차는 웩~웩~ 기적을 울리며 고향 역을 떠나가고, 가족이나 연인들은 짝을 지어 돌아다니며, 놀이동산의 바이킹은 시계추처럼 양쪽으로 높다랗게 흔들거린다. 동물원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엔 약 20여명의 청소년들이 갈지자를 그리며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관리소에 의하면 일요일인 어제는 무려 260여명이 다녀갔다고 하니 썰렁한 겨울철에 생기를 지피는 무척 반가운 손님들이 아닐 수 없다.

곡성읍 동쪽가장자리에는 전라선 철로가 놓여 있어 옛날사람이라면 누구나 철로에 대한 추억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나 역시 골목친구들과 같이 가끔 기찻길을 찾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철로바닥에 엎드려 레일에 한쪽 귀를 대고 숨을 죽이고 있으면 ‘쟁그렁 쟁그렁’ 기차바퀴 구르는 소리가 멀리서 레일을 타고 가느다랗게 들려온다. 그러면 우리는 골목대장의 신호에 따라 재빠르게 레일위에다 대못(큰못)을 올려놓고 언덕 아래로 내려와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굉음과 함께 기차가 지나가면 번개같이 철로에 올라가 대못을 주워가지고 동네로 돌아와서 양지바른 담벼락에 모여앉아 칼날같이 납작해진 대못머리를 막대기에 박아 스케이트 창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땡땡 언 죽동방죽에서, 동네 앞 논에서, 집 앞 큰길에서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고 겨울 내내 신나게 놀았다.

도둑기차를 탄일도 있다. 기껏해야 헌책을 사러 남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기차표 없이 달리는 기차에 올라탔다가 화장실 등을 이용해서 검표를 피한 뒤 곡성역에 도착하기 전에 뛰어내려 역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차가 느린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철부지 때의 위험한 장난이었다.

그 시절 우리 같은 시골아이들에게 기차는 큰 구경거리였고 철로는 재미있는 놀이터였다. 어른들이나 간수들의 눈을 피해 철로레일위에 올라가 누가 더 오래 걷나 내기도 하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철뚝다리(철교)를 건너다니기도 했으며, 기차가 지나가면 칸수를 세거나, 손을 흔들거나, 양놈주먹질을 해대며 놀았다. 그리고 역전마당은 참외집산지로 유명했는데 어쩌다가 맛있는 까치참외껍질이라도 얻어먹게 되면 재수가 좋은 날이었다.

그 기찻길과 곡성역이 지금은 섬진강기차마을이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다.

작년 여름, 여수에서 살고 있는 둘째아들 내외가 손자들을 데리고 기차마을을 보러 곡성에 왔다. 마침, 성수기의 휴일이라 그랬던지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에도 불구하고 기차마을 매표소는 몇 십 미터씩 줄을 지어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나는 고향의 특권(?)으로 무료입장이 가능했지만 아들네가족은 무료입장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입구로 다가갔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잉~ 식구들끼리 오셨능갑네요잉~ 어서 들어가십시오”

“어이, 고맙네잉~ 그나저나 뜨거운디 애쓰네잉~ ”

마침 나를 알아보는 안내원덕에 싸잡아서 쉽게 들어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순간, 내 고향 곡성에 사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들내외 역시 얼마나 흐뭇했겠는가? 의기양양한마음으로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을 훑어보며 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날은 하루 종일 신바람이 나서 아들가족에게 친절한 안내자요 명해설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기차마을 북문입구에 조성된 상수리나무 길과 똘감나무 길을 좋아해서 종종 찾아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섬진강기차마을이야말로 지방자치가 만들어낸 걸작임을 실감한다. 그 동안 외지인들에게 자존심을 버려가며 구례곡성이라고 말 해왔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섬진강기차마을 때문에 곡성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섬진강기차마을이 있기까지, 맨 처음 기차마을을 설계하고 기초를 다진 고현석 전 군수의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거기다 장미원과 침곡역 레일바이크를 보탠 조형래 전 군수, 그리고 사계절스케이트장 등을 보완한 허남석 군수와 그동안 열심히 일해 온 관계자여러분께 감사드린다.올 여름에는 작년가을에 출가한 딸네식구들을 기차마을로 부를까한다. 지난여름처럼 그저 얼굴만 내밀어도 고향사람인지를 척척 알아보고 무료입장시키는 세심한 배려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비록, 섬진강변 조용한 시골마을 곡성에서 나고 사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들이지만 제 고향 곡성의 섬진강기차마을만큼은 땡전 한 푼 안내고도 당당하게 입장하는 신명난 고향의 특권을 오래도록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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