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창 순 (前 곡성중앙초등학교 교사)

오래전 어느 뉴스에 ‘하천전투기’가 등장한 적이 있다. 미국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생산한 이전투기의 본명은 ‘F111’이다. 멀쩡한 제 이름 두고 다른 것으로 전파를 탄 까닭은 엉뚱한데 있었다. 뉴스를 전한 아나운서가 로마자 ‘F’(에프)와 숫자‘111’을 한자‘下川’(하천)으로 오독한 것이다. 육필원고가 대부분이던, 한자를 섞어 갈겨써 ‘해독’이 필요했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춘래불이춘’이라 구성지게 읽은 방송인도 있었다. 당나라시인 동방규의 시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胡地無花草)/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네(春來不似春)’의 ‘似’(같을 사)를 ‘以’(써 이)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었다.

흔히 봄을 ‘여인의 계절’이라 하지만 봄날의 여인이 아름답게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손로원의 노랫말에 박시춘이 가락을 입혀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의 ‘연분홍 치마’는 왠지 처연하고, ‘씹어 무는 옷고름’은 봄날 보내는 이의 절절함을 더한다. 이은상이 노래한 ‘봄 처녀’에는 ‘새 풀 옷 입고’ 날갯짓하는 ‘봄처녀 나비’의 팔랑거림이 ‘하얀 구름 너울’에 겹쳐 보이는 듯하다.

봄의 ‘말밭’에는 여느 계절에 없는 게 있다. ‘봄을 맞아 이성 관계로 들뜨는 마음이나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봄바람‘이 본보기이다. 그저 부는 바람인 가을(겨울)바람과 다른 것이다. 봄기운, 봄나들이, 봄노래, 봄놀이, 봄맛, 봄소식, 따위도 다른 철에는 나타나지 않는 조어다. 한겨레신문 ‘말글살이’에 나온 글이다.

흘러간 유행가타령 좀 더해보고 싶다.

1939년에 발표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고운봉이 노래한 ‘선창’의 노랫말은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이다. 여기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를 ‘꽃씨를 심던 그날 밤’으로 잘못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한다. ‘꽃씨를 심던 그날도’는 봉숭아, 해바라기, 채송화 등의 꽃씨를 심던 날을 말하지만 ‘꽃씨를 심던 그날 밤’은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던 밤으로 그 뜻이 완전히 달라져버린다. 이미 고인이 되신 작사가는 지하에서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래의 노랫말과 달리 ‘꽃씨를 심던 그날 밤’으로 즐겨 부르는 그 엉큼함이 재미있다.

1941년에 발표한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가 노래한 ‘찔레꽃’의 노랫말이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그런데 늦은 봄, 남쪽나라 내 고향 전라도의 산야에는 온통 하얀 찔레꽃이 만발할 뿐 붉은 찔레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어찌된 것일까? 그렇다고 국민가요의 노랫말이 틀릴 리는 없을 테고 짐작컨대, 일제강점기 고향산천을 떠나 만주벌판 등에서 일제와 싸우던 독립군이나 그 곳에 이주해 살던 우리 동포들이 이북의 어느 바닷가고향마을에 붉게 핀 해당화를 그쪽에선 찔레꽃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싶다. 그리고 ‘동무’라는 정감어린 우리말이 북한에서 쓰는 말이라 하여 잘 쓰지 않는 것도 가슴 아프다.

박근혜 당선인이 처음 지명했던 국무총리 후보자와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도덕성논란으로 자진 사퇴했다.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새 정부의 출발이 매끄럽지 못해 불안하다.

우수를 이틀 앞둔 날 아침, 어느 중앙 일간지에 실린 주요기사 제목이다. 레슬링의 전설 심권호의 충격, 외국무기 중개상 위해 일한 국방장관 후보, 헤커 박사 북 3차핵실험 성공적, 교과부 장관의 교과서 수정명령 대법원서 제동, 박근혜 정부 출발은 제대로 할까, 김병관 아들에 아파트 증여 때 편법탈세 의혹, 유정복 친형 인천공항 공사 수의계약 검?경 불법 하도급 혐의 등 수사 나서, 황교안 검사 때 수사기록 등사 거부해 위헌 판정, 박 당선인 문고리 참모 비리연루에 침묵, 충남교육감이 장학사시험문제 유출 지시 등등... 올림픽의 효자종목인 레슬링이 핵심종목에서 제외됐다는 안 좋은 소식을 시작으로 장관후보자들의 비리의혹 및 각종 부정부패로 지면이 얼룩져 있어 어째 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춘래불사춘’인가?

하지만 양지바른 담 밑에 심어놓은 매실나무 꽃망울이 한껏 부풀어 오른 걸 보면 봄의 문턱이다. 나는 해마다 이른 봄만 되면 도림사 계곡이나 침곡 골짜기의 등산로를 즐겨 찾는다. 왜냐하면 마치 노란 전구를 켜놓은 것 같은 샛노란 생강나무 꽃이 잎보다 먼저피어 가지마다 납작 엎드린 채로 환하게 반겨주는 멋진 장면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마음 상하고 삶에 지치거나 또는 새 봄의 정취를 맛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올봄에는 하루쯤 내 고향 도림사 계곡이나 침곡 골짜기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족을 단다면 생강나무는 생강이 달리는 나무가 아니라 꽃이나 잎과 가지에서 생강냄새가 난다고하여 붙은 이름이다. ‘붉은 찔레꽃’이 생각나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우수도 지나고 경칩도 열흘정도밖에 안 남았다. 아, 때는 바야흐로 봄! 봄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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