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거부(前 창평농협 전무)

지난 10월 17일 오전 11시 창평면 신청사가 전통 한옥 양식으로 새롭게 재탄생됐다.

이날 준공식에는 이곳이 옛날 창평현청(昌平懸廳) 자리였다는 내용이 수록된 현판 제막식도 함께 했다.

창평면사무소 신 청사는 호남 유일의 전통한옥 청사로 복원했으며 우리 전통 한옥에 어울리는 기둥과 서까래, 마당의 나무 한그루 까지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내부의 여러가지 현대시설들도 한옥과 어울리도록 설계했다.

창평면사무소는 지난 1981년 슬라브 구조로 지어져 협소할 뿐만 아니라 노후화 돼 지역을 상징하는 주변 고택 한옥과도 어울리지 않아 주민 등의 신축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따라 담양군은 2007년 12월 1일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슬로시티의 이미지와도 걸 맞는 한옥신축청사 신축계획을 마련했다.

사업기간은 2012년 6월부터 2014년 10월17일까지 2년 4개월이 걸렸고 사업비는 21억9천5백만원이 소요됐으며(국비2억, 도비 5억,군비 14억9천5백만) 건축면적은 건축물 1동604,80㎡ (182.95평) 건축구조는 일반목 구조와 시멘트 기와로 지어졌다.

슬로시티 창평의 랜드마크로 이 지역을 찾은 모든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 할 것으로 기대된다.

창평은 삼한시대에는 구계국(狗溪國) 백제때는 굴지현(屈支縣)이다. 신라 경덕왕16년 757년에 기양현(祁陽縣)으로 고치어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에 복속시켰고 고려태조 23년 (940년) 지금의 이름인 창평현으로 개칭되고 나주에 복속시켰다. 조선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창평현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창평현의 읍치는 원래 고산아래에 있었는데(현재의 고서면 고읍리 지역)풍수가 순조롭지 못하다 하여 정조 17년(1793년)에 창평현령 조광존이 반룡산(현재의 월봉산) 아래인 동면 삼지천리 일대로 옮겨졌다고 한다. 고서면 고읍리 지역에 있던 창평현의 중심지가 현재의 창평면 창평리 일대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1914년 2월 28일 부령 제111호 (1913년 12월29일 공포)에 의하여 1914년 3월1일 일제가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창평군을 담양군에 합속시켜서 현재의 창평은 담양군에 속한 1읍 11면 중의 한 면 단위인 창평면으로 개칭됐다.

창평은 본래 유학을 숭상한 고을로 공교롭게도 공자의 거향과 지명이 같아서 호남에서는 ‘유아향儒雅鄕, 사부향師父鄕’으로 불러온 굴지의 고을이다.

산수의 지령이 호응하여 조야에 출중한 인물이 배출되어 퍽 좁은 고을이었지만 도학. 문장. 충효. 관작이 다른 큰 고을을 능가하였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428명이었다고 하니 거창하고 웅걸 한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창평은 ‘광.라.장.창’ 즉 광주. 나주. 장성. 창평으로 알려진 학문과 문학 그리고 구국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 세부자의 구국적 창의는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의 말이 나오게 된 동기가 되었으며 호남지방이 한말의병의 주무대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대표적인 선비고을로 평가받는 창평은 임란한말의 의병활동인 의향이며, 쌀엿.한과.장류 등의 음식물인 미향이며, 돌담길과 오래된 고택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예향이며, 수남학구당.수북학구당.영학숙.창흥의숙 등 한말교육 신학문의 발생지이며 요람지인 학향의 고을이라고 한다.

우리 지역의 명예에 걸맞는 아름답고 웅장한 새 청사가 지어졌음은 실로 자랑할 만한 일이긴 하나 우리 면민은 새청사만 자랑하지 말고 이에 걸맞게 생각과 행동이 변해야 하며 나보다는 지역을 먼저 생각하는 면민이 되어야 하며 창평의 자존심과 긍지, 정체성을 갖고 모두 분골쇄신하여 거듭나는 창평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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