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순(곡성민주사회단체협의회 대표)

큰스님이 제자와 함께 먼 고행의 길을 떠났다. 산 넘고 물 건너,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돌아다니다 어느 개울가에 다다랐다. 큰스님과 제자는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다. 거의 다 건너갈 무렵,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큰스님과 제자는 동시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느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개울가에서 안절부절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큰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는듯하다가 이내 되돌아가서 그 여인을 등에 업고 다시 개울을 건너왔다. 그리고 개울가에 그 여인을 내려놓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내내 제자는 그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큰스님에게 여쭤보았다. “스승님,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배웠는데 스승님은 어찌하여 그 여인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습니까?” 그러자 큰스님은 껄껄껄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여인을 등에서 내려놓은 지가 오래되었거늘 너는 아직도 업고 있느냐?”

내가 초등학생 때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때 혁명공약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억지로 외워야 했다. 그리고 제대로 못 외는 아이들은 방과 후에 따로 남아 벌을 받아가면서까지 외웠다. 어쨌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는 혁명공약1조 때문에 내 학창시절은 각종 반공행사로 인하여 조용한 날이 없었다. 반공웅변대회를 위시하여 반공강연회, 반공 궐기대회, 반공백일장, 반공표어짓기, 반공포스터그리기대회 등을 학교와 지역사회가 다투어 개최하였으며, 그런 행사에 반대표, 학교대표, 지역대표 등으로 뽑혀 다니느라 바쁘기만 했다. 철부지 어린소년이 그저 시키는 대로 같은 동포를 미친개, 뿔난 도깨비 등의 철천지원수로 만들어 때려죽이고, 찢어 죽이고, 단두대로 보내자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큰소리로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시간에는 “우리의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따뜻한 마음으로 어깨동무를 해가며 씩씩하게 부르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어리석기도하고 헷갈리기도 한 추억하고 싶지 않는 내 유년의 아픈 기억이다.

작년 여름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나는 집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방이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처음에는  어디 멀리서 핵폭탄이 터진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 즈음, 날이면 날마다 TV에서 핵, 북 핵, 북한 핵하고 어떻게 핵핵거렸던지 선뜻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서 그런가? 그때나 지금이나 한민족 때리기는 변함이 없다.

이제 큰 스님도 등에서 여인을 내려놓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제자는 이미 늙어서 쪼그랑할망구가 되었을 그 여인을 아직도 등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부질없는 질투와 미움, 대립과 반목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땅의 현실 아닌가!

20세기 초, 미국과 소련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대결했던 냉전의 시대는 이미 간지 오래다. 제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요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선 구시대의 유물을 아직도 등에 업고 낑낑대고만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이제 하루라도 빨리 늙어빠진 할망구를 등에서 내려놓고 그동안 중단됐던 남북 간 대화의 물꼬부터 속 시원히 터야한다.

얼마 전, 한 야당대표가 새해 기자회견에서 “4.19혁명을 군홧발로 짓밟고 시작한 박정희체제는 재벌특혜와 정경유착, 반공이데올로기와 공안통치, 지역차별과 노동배재 등의 낡은 유산을 남겼다. 이 낡은 체제가 키운 부패권력의 종말이 바로 ‘박근혜-최순실게이트’였다”면서 “천만 촛불은, 단지 한순간의 분노가 아닌 박정희에 짓밟힌 4월 혁명의 눈물, 전두환에 짓밟힌 5월 광주의 눈물, 노태우에 빼앗긴 6월 항쟁의 눈물이었다”고 강조했는데 단순히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을 넘어 박정희정권부터 내려온 경제, 사회, 정치영역의 모든 적폐를 청산해야한다는 취지여서 공감이 갔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정부 때 공들여 이룩한 금강산관광, 소떼방북, 개성공단, 스포츠교류 등의 남북화해무드를 사정없이 짓밟아버린 이명박에 이은 박근혜정부는 이미 수명을 다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을 조속히 인용함으로써 새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실패한 남북관계를 정상화시켜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앞당기는데 초석이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외부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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