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5일, 6.15남북공동선언 17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날에 담양읍 중앙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됐다. 담양군 관내 2,700여 개인과 단체가 8,200만원을 후원했으며, 일본 대사관 앞에 건립된 김서경. 김운성 조각가의 의자 소녀상이 대나무를 배경으로 오롯이 자리잡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 담양평화의소녀상 추진위원회 상임대표인 손순용 전남도립대 겸임교수의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연재순서)

1. 담양의 소녀상 건립과정

2. 일본군 위안부 곽예남 할머니(94세)의 삶

3.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평화의 소녀상

 

3.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평화의 소녀상
   삼천리 방방곡곡에 평화의 소녀상을!

1)일본군‘위안부’ 용어 해설

일본군‘위안부’란 일본이 1931년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1945년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까지 일본군이 제도적으로 ‘군위안소’를 설립하여 점령지와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하여 성노예로 만든 범죄를 말합니다.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을 명기하고 역사적인 용어로서의 위안부를 따옴표 안에 넣어, 일본군‘위안부’로 표기합니다. UN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에서는 군대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으로 표현하여 ‘성노예’라는 범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국가가 여성을 강압적으로 동원하여 성폭력을 가했고, 피해 여성의 삶이 노예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종군’은 자발적으로 군대에 따라 갔다는 의미가 강하고, ‘위안’이라는 표현도 일본 군인들에게 성적 위로를 했다는 뜻이므로 동원의 강제성과 일본 군인의 성폭력 가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잘못된 용어입니다.
한편 일본군‘위안부’ 용어는 ‘여자근로정신대’와 혼동을 일으키곤 하는데, 정신대는 1944년 이후 일본의 전시체제 돌입과 함께 군수공장 등지에서 일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동원된 여성을 말합니다. 다만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여성 중에 일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이 있었기에 용어가 혼용되기도 합니다.  
2)일본군 위안소의 설치?운영

일본군은 1930년 초에는 중국 본토에 위안소를 설치하였으나, 전쟁이 동남아시아, 태평양 각지로 넓어지면서 주둔지 마다 위안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일본군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 여성을 비롯하여 중국,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에 거주했던 네덜란드 출신의 여성들 포함) 등의 여성을 강제 동원하였으며,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3)일본군‘위안부’의 생활

공개된 일본의 문서에 따르면 위안소는 ‘군위안소’, ‘군인오락소’, ‘위생적인 공중변소’ 등으로 불렸습니다. 군이 신축한 위안소의 경우 널빤지로 칸을 막아 겨우 한사람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으며, 방문은 담요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위안부들은 주간에는 부사관과 병사, 야간에는 장교를 상대하였으며, 몸이 아프거나 생리가 있는 시기에도 군인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위안부들은 하루에 10명~20명, 많을 때는 40여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일본군들에게 위안부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존중 받아야 한다는 인식은 아예 없었으며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는 군수물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일본의 패전 이후 많은 위안부들은 현지에 그대로 버려졌으며, 언어도 지리도 모르는 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현지 남성의 첩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국내에는 이미 사망신고가 되어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안소의 휴유증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계속해서 고통을 겪는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국에서의 삶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4)할머니들을 돕는 기관

일본군‘위안부’ 피해 문제를 올바로 교육하고, 미래에 동일한 역사적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이를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문제를 주제로 한 역사관이나 박물관, 기념조형물이 설치되어 전쟁의 심각성을 알고 진정한 평화의 의미와 보편적 인권의 중요성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과 역사관이  있습니다. 방문하시는 분들은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는 피해 할머니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인권의 중요성과 고통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미술 치료를 통해서 그렸던 다양한 미술 작품을 통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서울)에는 정부가 피해신고를 받게 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방문하시는 분들은 고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과 관련 자료, 피해 할머니들의 메시지 등을 통해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5)평화비 국내 건립 현황

국내 평화비와 소녀상은 2017년 4월 13일 현재, 총 67개가 세워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최초의 평화의 탑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정서운 할머니 추모위원회에서 2007년 5월 26일, 경남 하동 평사리공원 취간립에 설립하였습니다.
현재 일본대사관 앞에 설립된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번째를 맞이하여 김서경.김운성 부부 조각가가 할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작품입니다.
광주의 경우 광주시청 앞 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이 서 있으며, 전남의 경우 해남공원, 목포 일본영사관 앞, 무안 전남도청 앞 중앙공원, 곡성 레져문화타운, 순천 조례호수공원, 나주 학생독립운동기념관, 여수 이순신광장 등 7개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 6월 15일 담양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립되었습니다.
평화비는 국내에 국한 되지 않습니다. 1977년 일본 오사카 노자키에는 대동아전몰한일간호부위령비가 있는 데 비 뒷면에는 ‘조선처녀여자정신대 7만여 명, 일본간호부 2만여 명의 고귀한 영령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과 미국에서는 기림비로 세워졌으며, 평화의 소녀상은 미국 3개소, 캐나다, 호주, 중국, 독일 등지에 각 1개소 등 총 18개에 이르며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건 연표

▲ 1931. 09. 만주사변.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움
▲ 1932. 01. 제1차 상하이 사변, 일본 해군이 최초로 위안소 설치
▲ 1990. 11.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결성, 일본군‘위안부’ 문제 본격제기
▲ 1991. 08. 14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최초 증언
▲ 1992. 01. 08 수요시위 시작
▲ 1993. 08. 04 고노담화 발표. 일본정부와 군이 일본군‘위안부’ 운영에 관여했음을 인정
▲ 1995. 08. 15 무라야마 담화. 일본정부가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이전 침략에 대해 사죄함
▲ 2007. 03. 아베 총리, 관헌에 의한 강제 연행 부인
▲ 2010. 10. 미국 뉴저지 주 팰리세이크 파크에 위안부 기림비 건립
▲ 2011. 12. 14 1,000번째 수요시위. 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 건립됨
▲ 2012. 05. 05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개관
▲ 2015. 12. 28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외교부장관 합의. 피해자와 시민단체 의견을 무시한 졸속 합의로 비판 받고 있음
▲ 2017. 06. 15 전남 담양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소녀상에 세겨진 평화의 시

        시 : 김정원(한빛고 교사)  
        글씨 : 수민 김명석 선생

산산이 조각난 소녀의 꿈이여
갈기갈기 찢긴 소녀의 삶이여
일본 정부는
전쟁 피해 위안부 여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라
명예를 회복하라
그리하여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동아시아에서 세계로
평화와 인권을 꽃 피우기 위하여
의향 담양 군민이 한 뜻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니
푸른 대숲에서 날아올라라
노란 나비여
높이높이 더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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