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렬 교수(전남도립대 경찰경호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양심은 돌변하는 바람과 같다. 우리를 미치게 하는 것은 선악과 양심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갑을에 담긴 한국적 상하관계, 관존민비식 승자독식의 뿌리 깊은 공포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갑을의 부조리를 들여다 풀 수 없다고 한다.

상하 혹은 갑을은 어느 가족.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다. 어려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상하의 질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상하관계가 획일적이 되면 그 조직이나 구성원 간의 관계는 공포 그 자체가 된다.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과 상관없이, 출생에 의해 정해지는 嫡庶와 班常의 대조적인 인생전망은 폐쇄적 갑을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같은 경직된 신분제의 정신적 틀이 상하. 갑을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한국인의 의식속에 내재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상(甲)이 하(乙)에 윽박지르거나 고함을 처도, 부당한 요구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하(을)를 얕잡아 보고 불평등을 강조하는 상(甲)의 심리는 쉽게 학습. 전염돼, 하(乙)는 또 다른 하에게, 또 다른 하는 또 다른 하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상하와 갑을간 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잔인하고 탐욕스런 갑의 승자독식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에 탄 한 대기업 계열사 상무가 ‘라면을 제대로 못 끓인다.’며 항공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 제빵회사 회장이 호텔 도어맨 빰을 지갑으로 때리거나 남양유업 직원이 대리점 주인에게 폭언을 퍼부은 일이 갑의 당연한 권리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이와 같은 과도한 승자독식 문화가 전근대적인 계층의식과 만나 갑의 횡포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이 있는 갑들이 ‘내가 어떤 경쟁을 뚫고 이 자리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약자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수평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급속하게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한국 사회에서 봉건적 가치관과 서구 계약문화가 혼재하면서 생겨난 부작용이 갑을관계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다. 계약 당사자는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게 서구의 계약문화이지만 실제로는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런 물질적 불균형이 인격적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게 한국적 갑을 관계의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경제적 동기가 개입된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갑을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장도 그렇다. 조직에서 개인은 대체로 미약한 존재다. 잘리지 않기 위해 하기 싫은 야근도 해야 하고, 술상무 역할도 기꺼이 맡아야 한다. 그런 사람도 거래처에는 갑이다. 작은 흠이라도 잡아 ‘자꾸 이러시면 거래 못합니다.’라고 겁을 준다.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힘들다는 협력업체가 자신의 하청업체는 어떻게 대하는지 궁금하다. 고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속담도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부당한 갑을관계에서 낙오된 우리 시대의 을들은 ‘억울하면 출세해서 갑이 되어라’라는 말에 세뇌되어 구조적인 불평등을 자기가 못난 탓, 가지지 못한 탓, 배우지 못한 탓, 연줄없는 탓으로 돌리며 그 억울함과 분노를 되삼키고만 있다. 그리고 그들은 급기야 갑의 부당한 황포에 밀리고 밀려 막다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갑의 몸집은 거대한 괴물처럼 불어나고 을의 몸뚱이는 최소한의 인간성마저도 확보하지 못한 채 그렇게 톼화되어 간다. 단기적으로 보면 갑의 승리로 끝나는 듯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갑의 몰락 또한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을이 없는 갑이란 존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민없는 국가, 노동없는 자본, 대리점 없는 프랜차이즈 본사, 더 나아가 자연없는 인간, 여자없는 남자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갑과 을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 작동하는 구조적 메카니즘 하에서 이처럼 왜곡된 갑을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은 갑과 을 양자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뭔가 다른 관계 설정이 시급한 시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갑의 횡포는 공분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한국 언론은 을의 반란이라고 했는데, 을의 반란이 일어난 이유로는 스마트폰의 등장과 SNS의 확산, 경제민주화 등이 꼽힌다. 하지만 갑과 을 사이의 권력관계가 역전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과 SNS 발달은 물론 휴대전화로 녹화와 녹취가 언제든지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을이 억울함을 알리는 방법이 다양해졌을 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명백한 악인은 없다. 갑이 항상 갑일 수 없다. 을이 갑이 되는 기회가 열린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고, 부지런한 동시에 게으르다. 동시에 관대하고 밝은 성격 이면에 어두운 과거가 숨어 있다. 누구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관계의 참된 매력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지녔다는 것을 인정할 때 생긴다. 갑을관계도 마찬가지다. 갑은 을이 지닌 장점에 주목해서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 공산주의, 권력의 싸움, 전쟁, 질투, 미움, 모두 부와 힘을 더 뺏고 가지고 싶어서 비롯된 것들일 것이다. 우리는 뺏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협동과 나눔의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성공 가능성이 큰 길일 것이다. 옆으로만 기어다니는 게들을 상자 속에 넣었을 때, 게들은 서로를 잡아끌어 내리는 속성 때문에 상자 밖으로 한 마리도 못나온다고 한다. 이는 가족이나 집단끼리 서로 격려와 지지를 해주어야 함께 발전한다는 뜻일 것이다. 흑고래들은 아무리 멀리 가족 고래가 있어도 서로 상대방의 노래를 알아들을 수 있고, 또 다른 고래가 노래할 때도 방해하지 않는다. 좋은 관계는 의사소통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경청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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