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의 억울한 누명 - 己丑獄事의 진실

▲ 송강 정철

1589년 기축년 겨울에 벌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 전과 후 조선 정치 풍토를 갈라버린 참혹한 사건이었다. 논리로 싸우던 당쟁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으로 변해버린 사건이다.기축옥사는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하룻밤 새에 여당인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고, 그가 반역을 꿈꾸다 발각돼 벌어진 사건이다. 역적 토벌을 빌미로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가 학살당하고 유배당한 참극이다.

당시 선조의 명을 받아 정여립 사건을 수사한 책임자는 서인의 당수 정철이었다. 그에 대한 한이 사무쳐 동인의 후손들은 도마질을 할 때도 '정철정철정철'하며 고기를 썰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한 정철이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조사하면서 호남지역 선비들에게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하는 상소를 올리게 해 이를 이용했다는 소문을 두고는 우리나라 최초로 ‘투서문화’를 만든 장본인이 정철이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이어져 온다.

이런 가운데 최근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가 기축옥사의 진실을 기록한 ‘선비 1000명 학살범은 정철이 아니라 국왕 선조’란 제하의 기사에서 己丑獄事 때 선비 1000명을 학살한 주범은 정철이 아니라 국왕 선조였다는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종인 기자는 이 기사에서 과연 정철이 주범(主犯)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수사를 빌미로 정적을 떼로 제거하기는 했지만 주범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범은 선조라고 단정한다. 정여립 사건이 마무리 된 후 “악독한 정철이 내 선한 선비들을 다 죽였다”고 분노한 그 국왕 선조라고. 권력을 위해서 논리와 이성과 사람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왕이라고.


사건의 시작


박종인 기자는 기축옥사의 시작을 1589년 10월 2일자 선조실록에 의거,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589년 음력 10월 2일 황해감사로부터 임금에게 비밀 서장이 접수됐다. 이를 친람한 선조는 그날 밤 정승과 승지를 모두 소집시켜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황해도와 전라도에 금부도사와 선전관(왕명을 받은 무관)을 파견했다. 동인 정여립의 반역 첩보로 시작된 기축옥사는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이르는 동인이 죽거나 유배당한 대참극이었다.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에 있는 죽도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꾸리고 역적모의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전라도 진안현감 민인백이 토역 대장으로 죽도에 은거하던 정여립 세력을 토벌했다. 관군에 포위된 정여립은 땅에 칼을 세워 목을 스스로 찔러 죽었다. 정여립 시신은 서울로 압송돼 몸이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다. 함께 체포된 다른 역당도 마찬가지였다.

옥사를 지휘한 서인 당수 정철은 21세기까지도 학살극 총책으로 비난받고 있다. 그런데 여러 기록은 자기 권력을 위해 정철을 조종한 당시 최고 권력자 선조를 주범으로 가리키고 있다.


기축옥사의 주범은 ‘선조’


박 기자는 선조를 주범으로 단정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열거했다.

정여립이 자살하고 동인으로 구성된 역적들이 대거 처형된 다음에도 선조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역모 적발 한 달 만에 선조는 전국에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렸다. '초야에 사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각각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을 펴서 숨기지 말고 극언하여 나로 하여금 위아래에 죄를 얻는 일이 없게 하라.'(1589년 11월 1일 선조수정실록)

구언교지는 상소 내용이 그 무엇이든 벌하지 않겠다는 면책 선언이다. 대개 구언교지는 국정에 대한 충언을 구해야 마땅했지만, 이번 교지는 섬뜩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경고에 다름없었다. 봇물 터지듯 상소가 몰려왔다. 그 가운데 우의정 정언신과 이조참판 정언지가 정여립과 친하다는 상소가 있었다. 정언신은 정여립 사건을 조사하는 재판장, 위관(委官)이었다. 11월 7일 정언신은 위관에서 즉각 사퇴했다.

다음 날 선조는 고향인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을 불러들여 우의정에 임명했다. 사양하는 정철에게 선조는 세 번이나 내시를 보내 입궐을 명했다. 정철이 병을 이유로 거듭 사양하자 선조가 “가마에 실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고 일렀다. 결국 서인 당수 정철이 정여립 역모사건의 특검단장이 됐고 향후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들이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됐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3년 동안 조선 정계를 휩쓸었는데도 그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꾸몄는지부터 이 모든 수사 과정을 과연 정철이 지휘했는지까지. 동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철을 천하의 모사꾼으로 표현했고 서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철이 최영경을 비롯한 많은 이를 변호했다고 기록했다.

서인은 오히려 정철에 이어 위관에 임명된 류성룡이 이발 가족을 포함한 거물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록 또한 북인이 쓴 '선조실록'과 서인이 쓴 '선조수정실록' 기록이 각기 다르다. 이긍익이 쓴 사서 '연려실기술'은 아예 '동인 기축록은 파란 점(靑點)을, 서인 기축록은 붉은 점(紅點)을 달았다'고 구분해놓을 정도다.

도대체 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사건의 전말이, 4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몸통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토역관으로 파견된 진안현감 민인백은 토역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임금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내려 보낼 때 적가문서를 압수해오라고 명했다.'적가문서(賊家文書)'는 역적 집에서 나온 문서 일체다. 정여립이 쓴 글은 물론 정여립이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도 포함돼 있었다. 선조는 금부도사에게 친히 명을 내려 그 문서들을 수거해오라고 지시했다. 수사 독려를 위해? 아니었다. 선조는 그 문서를 추국청에 넘기지 않고 본인이 독점하고서 친국(親鞫), 직접 수사를 한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우의정 정언신은 이들을 따로 만나 자기 이름이 있는 문서는 없애달라고 청했다. 정언신은 정여립의 먼 친척이었다. 선전관 이용준은 정언신 이름이 있는 문서는 다 파기해버렸다. 하지만 글자를 몰라 형 정언지(이조참판)의 호인 '동곡(東谷)'과 '집안 연장자'를 뜻하는 '종로(宗老)'가 적힌 편지는 없애지 못했다.

선조가 수사 회의에서 '종로' '동곡'이 있는 편지를 흔들며 물었다. "이게 누구냐!" 정언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조가 대로했다. "내가 일찌감치 이 편지를 꺼내지 않은 것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고 염려되는 것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다. 이런 미욱한 놈이 정승을 한다는 말인가!"선조는 정언신에게 중도부처형(일정 장소에 안치하는 형)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뒤 선조는 적가문서에서 정언신이 쓴 편지 19장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나를 눈이 없다고 여기는 것인가?" 수사관들은 파직되고 정언신은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죽었다. 전 병조참판 백유양이 혐의를 부인하자 선조는 그를 친국하며 역모가 가장 심한 편지를 골라 보냈다. 곡성현감 정개청 또한 임금이 보낸 편지로 혐의가 드러났다. 두 사람 모두 죽었다. 최영경은 선조 친국 때 역적과 서로 통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가 선조가 내민 편지 두 장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

매사가 그러했다.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국왕 앞에서 그 어떤 위관(재판장)도 그 어떤 추관(심문관)도 입을 함부로 열지 못했다. 동인 당수 이발을 친국할 때 이발의 편지 9장을 흔들던 선조는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칠어 모든 신하가 오들오들 떨었다. 비판 세력을 철저히 도태시켜 왕권을 절대화하려 한 왕이었다.

선조는 정철을 앞세워 목적을 달성했다. 유배를 보낼 사람을 사약을 내려도 감히 대들지 못했고, 사약으로 마땅할 자를 찢어죽이라고 해도 위관과 추관은 우물쭈물댔다. 선조가 그들에게 선언했다. "편지가 남아 있거늘, 아무리 중형을 받아도 무슨 유감이 있으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1589년 12월 7일 '선조실록')

서인 총책임자 정철은 이러저러한 사연 끝에 선조 눈 밖에 나서 임진왜란 도중 벼슬을 내놓고 강화도에서 죽었다. 훗날 정철의 둘째아들 종명은 자기 아버지가 악인이 아니라고 신원 상소를 올렸다. 종명은 강화도에서 아비에게 새끼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연명시킨 아들이다. 지금 정철은 충북 진천 환희산 자락에 종명과 같이 잠들어 있다. 고향인 고양 선산에 있다가 정신적 후배인 우암 송시열의 점지로 옮긴 묏자리다. 권력을 완성한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악독한 정철이 내 선한 신하들을 다 죽였다." 정치판이 완전히 망가지고 3년 뒤 전쟁까지 터진 판에 기축옥사의 몸통이 던진 말이었다.


정철과 담양


송강 정철은 1536년 서울 장의동(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으로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이다. 정철이 10세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면서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맏형 정자는 광양으로 유배당했다.

정철은 1551년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해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정철은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의 외손주 사위다. 김윤제가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담양에 지은 정자가 環碧堂(환벽당)이다. 하루는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釣漁臺(조어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급히 그 곳에 가 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는 그 소년의 비범한 용모에 매혹되어 자신의 외손녀와 혼인을 시켰는데 이 소년이 장차 대 문호로 이름을 날린 정철이었다.

정철은 이곳에서 임억령을 만나 시를 배우고 양응정·김인후·송순·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성혼·송익필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552년 17세 되던 해에 창평에 세거했던 문화 유씨 유강항의 딸(김윤제의 외손녀)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0년 정철이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는데, 이 노래는 성산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한 사시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렸다.

1561년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담양과 많은 인연을 갖고 있는 송강 정철. 문인으로 정치가로 당대를 섭렵했던 정철에게 부정적 이미지의 상징으로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정여립 사건. 정여립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국왕 선조가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동인 선비들을 제거하고 미완의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 꾸민 참극에 정철이 이용당한 사건으로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박종인 기자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이같은 결론에 이르게 됐다면서 정철은 처음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어 박기자는 정철에게도 잘못한 점이 있지만 역사는 선조의 죄를 감추기 위해 정철의 잘못에 대해 상당부분 과대포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한명석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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