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석(발행인)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후.

당시 보성군 복내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여동생을 바래다주기 위해 광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당시 광주시 동구 대인동 소재)에 도착한 필자의 눈에 믿기 어려운 장면들이 들어왔다.

터미널 주변에는 착검을 한 소총을 비껴맨 공수부대원들이 손에 진압봉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들을 두들겨 패면서 끌고 가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포착됐다. 당시 군에서 전역한 지 불과 4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필자의 눈에도 정말 심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동생을 보성행 시외버스에 태워주고 터미널을 나선 필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금남로로 향하던 중 당시 한국은행 광주지점 옆 지하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지하도 입구를 응시했다.

순간 지하도에서는 메케한 냄새와 함께 뿌연 연기가 출입구를 통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논산훈련소에서 화생방교육을 받을 때 접했던 최루탄이었다.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지하도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지하도 출입구에는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젊은 청년들이 보이면 가차없이 두들겨 패고 인근에 세워둔 군용트럭으로 끌고 갔다.

이튿날인 5월 19일.

필자는 출근을 위해 시내버스를 타고 금남로 1가에 도착했다. 필자가 다니던 ‘뿌리깊은나무’ 잡지사 광주사무소는 도청 앞 전일빌딩 4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필자가 출근할 무렵만 하더라도 그다지 상황이 심각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출근한 직원들의 입을 통해 전날 도심에서 벌어졌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목격한 목격담이 이어지고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갑자기 계단을 뛰어오르는 묵중한 군화발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우루루 사무실로 들이닥쳐 금남로로 향한 유리창 블라인드를 모두 내리고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절대 올리지 말라고 하고는 7층에 있는 전남일보사(현 광주일보사)를 향해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필자를 포함한 직원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못내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면서 일손을 놓은 채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후 당시 전남일보 편집국 사진부 차장으로 재직 중이던 故신복진 씨가 조심스럽게 우리 사무실로 들어왔다. 신 차장을 통해 들은 전남일보의 상황은 처참했다.

공수부대원들이 편집국에 들이닥치면서 모든 업무가 마비되고 기자들은 화장실조차 공수부대원들의 허락을 받아야 갈 수 있을 만큼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전남일보 편집국이 자리했던 전일빌딩 7층은 완전 고립됐고 7층으로 향하는 건물 내 모든 계단에는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경계를 서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신복진 차장이 안주머니에 숨겨온 카메라를 꺼내더니 나에게 금남로를 향한 창문의 블라인드를 벌려달라고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블라인드를 벌렸고 신복진 차장은 금남로를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날 신복진 차장이 찍은 사진들이 훗날 5.18의 역사를 수놓은 중요한 자료로 등장했다.

1988년 새로 창간된 전남일보 창간호 ‘무등산은 알고 있다’라는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상당수 사진들이 이날 필자의 사무실에서 촬영한 신복진 차장의 작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금남로 1가 전일빌딩에서 건너편 YMCA로 향하는 횡단보도에서 한 청년을 붙들고 진압봉으로 내려치는 위생병 완장(붉은 십자가)을 찬 공수부대원의 모습을 찍은 것인데 5.18관련 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진이기도 하다. 당시 필자는 이 모습을 보면서 탄식했다. “세상에 완장이나 떼고 나오지, 전장에서 적군도 치료해줘야 할 위생병이 어쩌면 저럴수가...”

그날 점심시간 무렵 회사에서 조기 퇴근 지시가 내려왔고 직원들은 복도에 늘어선 공수부대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후문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갔다. 건물을 나와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쪽으로 향하던 필자의 귀에 “저새끼 잡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두명의 공수부대원이 필자를 향해 달려왔다. 순간 필자는 100미터 달리기 속도로 앞만보고 내달렸고 달리기는 산수동 오거리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다행히 필자를 쫓아오던 공수부대원의 모습은 모이지 않았다.

이후 필자는 5월이 다 가도록 출근하지 못했다. 당시 대학교수들을 비롯한 식자층에서 인기를 누렸던 잡지 ‘뿌리깊은나무’는 5월호를 발간하지 못했다. 다음 달에 5월호와 6월호 합본호가 발행됐다. 합본호는 5.18관련 기사는 단 한 줄도 실리지 못한 채 페이지 절반가량이 백지로 발간됐다. 독자들은 백지로 발간된 페이지가 검열에서 삭제된 5.18관련 기사였음을 미루어 짐작했고 일부 독자들은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뿌리깊은나무’는 1980년 5~6월호 합본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얼마 후 필자도 실업자가 됐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고 필자가 담양주간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당시 담양대나무축제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던 신복진 씨를 대나무축제행사장에서 만나 1980년 5월 19일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소회를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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