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담양군과 映畫의 榮華 같은 인연은 지속되고 있어

담양 군민의 영화문화 향유권을 확대하고 都·農간 문화 격차 해소와 문화예술공간 업그레이드를 위한 상설 영화관인 작은 영화관(가칭 담빛시네마)이 개관을 앞두고 있다.

군에 따르면 영화 관람을 보다 전문화하고 쾌적한 최첨단시설에서 고품질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지난 2017년 작은 영화관 건립계획을 수립한 이래 공모신청으로 균특예산을 확보한 후 영화관 건립에 따른 본격적인 행정절차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실시설계 용역을 완료하고 관련 조례를 제정한 후 본격적인 건립공사에 들어가 위탁회사인 ㈜댕스코와 계약을 체결하고 오는 8월 15일(예정) 개관을 목전에 두고 있다.

‘작은 영화관’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지방 소도시 주민들이 최신 개봉영화를 즐길 수 있는 50석 내외 2개관 규모의 영화관으로 입장료는 대도시 영화관의 반값 정도인 1인당  6000원 수준이다.

‘담빛시네마’는 코로나19로 지친 지역민을 위로하고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기 위해 국비 9억원 도비 1억5000만원 등 총 18억을 들여 건립했다. 440㎡ 규모에 2개관 98석(1관 50석, 2관 48석)의 관람석을 갖췄다.

2D는 물론 3D 입체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첨단 시설을 자랑하고 있으며 관람객 편의를 위해 매점, 화장실 등을 갖췄다. 관람료는 도시지역 일반영화관의 50~70% 수준이다.

개봉작을 비롯해 최신 영화를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어 지역민에게 큰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될 전망이다.

담빛시네마도 2개의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다. 대한민국 최초로 서울 강남에서 문을 연 씨네하우스의 뒤를 이어 CGV나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같은 체인이 세상을 선보이면서 시설 규모가 비슷하고 전국 동시 상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같은 영화를 같은 시간에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전국 시군구 243개 지자체중 100곳 정도가 아직 작은 영화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담양은 과거에도 영화 볼모지 였을까? 정답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근대식 극장이 생긴 것은 1902년 무렵 고종 황제 재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기념 행사장을 공연장으로 바꿔 사용 하면서 부터다.

이전의 전통 공연은 동네 마당이나 주변의 빈터, 강변 모래밭 같은 곳에서 진행했다. 극장의 등장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어두운 실내로 장소가 바뀌었고 날씨에 상관없이 공연이 가능해졌다. 구경에 몸이 단 청춘 남녀들도 몰려들었다.

공연장으로 시작한 그곳에는 프로그램에 따라 영화도 상영했고 강연이나 무대 공연도 했다.

장소 명칭도 연사(演社) 연희장(演戱場), 공연장(公演場), 상설관(常設館), 극장(劇場) 등으로 불렸다. 

해방 이후에도 극장에서 영화도 하고 악극단이나 가수들의 공연이 흔했다. 초기에는 공연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꾸몄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의 인기가 공연을 앞지르자 공연장의 프로그램은 영화가 주도했다. 그래도 명칭은 ‘극장’이 대세였다. 

‘극장 구경’이라는 ‘영화 보러 간다’는 뜻으로 통했다.

실제로 담양 영화관의 兩大山脈 역할을 하던 담양극장과 명성극장은 극장 시대의 끝판왕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하춘화 이주일 남진이 명성극장 무대에 서는 날이면 일대가 마비가 될 정도로 북새통을 이뤘고 이에 뒤질세라 담양극장에서도 쟈니김 트위스트김 배삼룡이 무대에 오르면 장사진을 쳐 人山人海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정도로 문화에 대한 목마름이 강했던 시설을 반증했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창 박동진 선생이 담양극장에서 창을 하는 날이면 공연 전부터 진을 친 이들을 정리하기 위해 극장에서 준비한 인력이 총동원 될 정도로 극장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1일 극장 수입 20만원 중 대다수인 15만원을 명창 박동진 선생 출연료로 지급 할 정도로 통 큰 섭외력이 극장 시대를 이어나간 원동력이 됐다.

또한 面 단위에서 唯一無二한 존재였던 창평극장에서도 만담의 국보같은 존재였던 장소팔 고춘자씨를 어렵사리 섭외해서 무대에 올려 극장 일대 교통이 마비가 될 정도로 대중문화 창달의 기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을 보면 문화의 파급력은 세월이 지나도 반감하지 않는 것을 입증케 한다.


▣극장의 興亡盛衰

담양에서는 최초로 1960년 문을 연 담양극장은 물론이고 3년 뒤 63년 5월 8일 개관한 명성극장, 60년 영화산업에 뛰어든 창평극장에 영화가 상영되면 관객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만원 사례를 이어갔다.

관객들이 영화 관람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앞 관객의 머리가 가리지 않도록 지그재그가 아니라 극장 주인들이 설치하기 편하도록 마련한 나무의자 만이 유일한 편의시설 이었지만 좌석을 꽉 채우고도 복도에 서서 볼 정도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실현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스크린을 앞에 두고 관객들이 앞을 집중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나 ‘겨울여자’, ‘영자의 전성시대’, ‘벤허’ 같은 영화들이 상영될 때 매표소 앞에 긴 줄을 이루던 일은 옛날 풍경이다.

지금은 같은 영화를 여러 곳에서 상영하기 때문에 편리에 맞춰 골라 볼 수 있고 예매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아 아무리 소문난 영화라도 줄을 서는 모습은 찾기 어렵지만 그 당시 극장의 경우 아무리 기다려도 줄어들지 않는 줄이 영화에 대한 애정을 반증하는 증표가 됐다.

실제로 담양극장 은막을 수 놓은 진주만 공격을 주 내용으로 한 ‘도라도라도라’ 작품의 경우 5일 내내 만원사례를 불러 일으킬 정도였으며 학생단체 영화로 상영된 명성극장의 ‘엄마 없는 하늘 아래’는 물론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쓴 수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극단적인 가난에 시달리는 소년 가장의 이야기를 담은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대표적 최루성 영화로 훌쩍거리는 소리가 가득 찰 정도로 한바탕 울음바다가 이루었다.

이처럼 호황을 누리던 담양 극장가는 1980년대 들어 컬러TV 보급과 인접한 광주시에 최신 시설을 갖춘 소극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관객이 감소하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는 담양군 통계연보에서 확인 할 수 있다.

1969년 극장 관람객 5만5007명을 정점으로 이듬해 4만3874명, 71년 4만1968명, 72년 3만7025명, 73년 2만9894명, 74년 2만3114명, 75년 2만3951명, 76년 2만2862명, 77년 1만2320명으로 1만명 대를 유지하던 관람객도 78년 4845명, 79년 3195명, 80년 6520명, 81년 7354명을 기록했다.(이후 관람객 통계연보 미등재)

창평극장이 80년 초 폐관 한데 이어 명성극장도 개점휴업 생태로 방치되다 90년 초반 임실 출신 사업가가 임대해 운영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았으며 1987년 행복예식장으로 변신을 한 담양극장도 세월의 변화에 2012년 문을 닫았으며 극장의 화려한 부활을 꿈 꾸고 1988년 공용정류장 맞은편 해동빌딩 3층에 320석 규모로 문을 연 아카데미 극장도 관객을 끌어 모으질 못하다가 1990년 무렵 폐관하고 말았다. 


▣극장의 비하인드 스토리

이처럼 극장은 대중문화의 풍경을 만든 중심이었지만 바라보는 눈길은 불편했다.

초기에는 돈 내고 영화나 공연을 보는 관객을 남녀 불문하고 할 일 없는 건달이거나 바람둥이 취급을 했다.

식민통치 하던 일제는 무조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경계하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특히 무성영화 시절 영화를 설명하던 변사의 행동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이 극장 내에서 일일이 지켜보곤 했다.

옛날 극장 시설 뒤쪽 출입구 근처에 따로 있었던 임검석(臨檢席)은 바로 장내를 감시하기 위한 자리였다. 

해방 후에도 임검석은 군청 공보실 직원이나 경찰, 교육청 관계자들이 자리를 지키며 영화를 관람하다 역할들이 미미해 지면서 이후에는 주먹패 건달들의 근거지 역할도 했다. 

사업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극장은 사람들이 넘치고 현금 수입이 보장되는 중요한 사업장이었다. 극장을 차지하는 조직이 자금줄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극장은 불온하고 위험한 곳이란 인상이 굳어졌다. 

중·고교생들이 교복을 입던 학창 시절 체육교사들과 학생주임들이 극장 앞에서 학생들을 감시하던 풍경은 연장선상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극장에는 영사기사, 간판 그리는 분, 기도 보는 분, 이렇게 세명은 三位一體였다.

특히 전문성이 있는 영사기사와 간판 그리는 분은 이해가 되지만 기도 업무를 본다는 건 극장 입구에서 불량배들이나 소매치기 등 나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관리했기에 마초 기질은 본캐이고 위엄은 부캐였다.

실제로 극장 경영과 기도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극장에서는 공연 때마다 건달, 불량배, 소매치기, 주정꾼, 싸움패, 무료 입장객들의 등살 때문에 이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깨들의 두목이나 실력자를 후한 대우로 고용 할 수 밖에 없었다. 

고용된 이들은 주로 극장 내무의 질서유지와 정문에서 표 받는 임무를 맡는데 이 정문을 일본말로 기도(木戶)라 부르고 그 책임자를 ‘기도주임’이라 명명했다.  /정종대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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