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옛 영화를 소중하게 간직했던 담양극장

▲ 예식장으로 변해버린 옛 담양극장. 사진속 인물은 당시 경영주였던 국중담씨. (본지 2009년 1월 22일 제9호 보도)


떡갈비로 이름난 신식당 주차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곳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담양극장의 흔적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이제는 담양을 찾는 관광객과 인근 상인들의 愛馬가 잠시 쉬어가는 주차장으로 변모했다.  
 
담양의 극장 역사에서 元祖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담양극장은 후발주자인 명성극장과 함께 兩大山脈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어서 세월이 흘렀지만 주민들은 잘 알고 있다. 

극장주 국보환씨의 장남 국중담씨는 “아직도 50~60대의 경우 지나가면서 이곳이 극장이었다는 얘기를 할 정도이다” 며 “지금은 쇠퇴했다고 하지만 오일시장으로 가는 통로여서 극장이 잘 될 때는 일대가 엄청 북적여 그 당시는 말 그대로 담양의 ‘명동거리’였다”고 회고했다. 

국씨는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다”면서도 청년시절을 함께 한 담양극장의 역사를 털어놨다. 

추억모드로 돌입한 국씨는 “옛날 극장은 그야말로 추억을 파는 곳이었제. 지금도 옛날 영화 제목만 들어도 그 시절 문화를 떠올리고, 옛날 음악을 들으면 그 때 향수를 느낄 수 있다” 며 “타임머신만 있다면 시계추를 20년, 아니 30년 전으로 돌려 '소싯적' 분위기에 취해 예전에 잘 나갔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을 이어갔다.

그는 “60-70년대 사람들에게는 영화가 그렇게 경건한 종교였다. 텔레비전도 아직 보급되지 않았고, 임춘앵과 김진진의 여성국극 말고는 연극 공연도 없었던 시절, 순회 곡마단과 장터 약장수가 큰 구경거리였던 시절, 소설책도 500권을 찍으면 ‘베스트셀러’라고 했던 시절, 영화는 문화의 총체였고, 생활이었고, 인생이었다” 며 “지금 사람들은 생활의 짜증을 ‘털어버리고 싶어서’ 영화를 본다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무엇인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 간직하고 살아가기 위해, 문화적 예식에 참가하기 위해 영화관으로 몰려들었다” 시대적 상황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담양극장은 1960년 정연호씨가 처음 문을 열었고 친형이던 정석호씨가 경영을 책임지다가 대한극장 창립자이며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낸 국쾌남씨의 어머니 김순옥씨에게 경영권이 넘어가 운영되어오다 1971년 국씨의 부친 국보환씨가 당시 550만원의 거금을 들여 사들여 운영하다 영신극장으로 改名 했지만 주민들의 뇌리에는 담양극장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 

주요 관객들은 담양군민들로 1·2층 통틀어 250석의 좌석은 물론 계단까지 빈틈이 없을 정도로 극장은 연일 활황이었다. 

종소리가 "뎅"하고 울리며 영화 시작을 알리고 거대한 커튼이 올라가고 애국가도 보았고 대한뉴스도 하였다. 

“불을 켜 놓아도 음침한 극장 안은 상영되기 전 찾아오는 약간의 긴장과 설레이는 마음은 극장에서만 느끼는 감정이었다. 만약에 상영시간이 되었는데도 소식이 없으면 쏟아지는 휘파람 소리와 ‘돈 내놔’ 하는 고함소리가 가득했다”며 “그러나 어느 순간 한줄기 빛이 부유하는 먼지 사이를 달려 스크린에 쏟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화 속에 몰입하여 마치 영화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다가 끝을 알리는 자막이 올라오면 현실 세계로 되돌아 온다”며 담양극장을 애용했던 이가 관객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맞아요, 그랬었죠. 또 영화 상영 도중에 들어가면 손전등을 든 안내원이 자리를 안내하고 쉬는 시간에는 과자, 모찌(찹쌀떡), 꽈배기, 덴뿌라(튀김), 음료수, 껌, 오징어를 나무 박스에 담아 팔기도 했다”며 국씨는 옛 추억을 더듬었다.

1일 2회(오전 12시, 오후 6시) 상영은 물론 공휴일과 명절이면 하루에 4-5회의 특별 상연을 통해 대박 신화를 이어갔다. 

주로 상영되던 영화들은 중국 무협영화에서 고교 얄개 시리즈, 전쟁영화, 서부영화들이 영사주임의 손을 거쳐 관객들에 전달되어 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 마을로 돌아가면 사랑방에서 또래 친구들에게 무용담처럼 전파되어 영화관에 오지 않으면 바보가 되어 버리는 매개체가 됐다. 

“조금 포(과장)를 치면 갈퀴로 돈을 긁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며 “영화비를 60원에서 80원, 100원, 150원으로 올려도 변함없이 지속되어 황금알을 낳는 산업으로 인식될 정도였다”고 회상하는 국씨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담양극장에서 개봉된 작품들은 광주 개봉관에서 처음 시장에 선보인 후 순천, 여수, 목포시 등 시 단위 영화관에서 다시 상영되고 광주 2류 극장을 거쳐 군 단위 극장에서 개봉됨에 따라 필름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화제작의 경우에는 1편당 4-5만원에 보급사로부터 임대하여 걸었는데 넉넉잡고 2-3일이면 본전을 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는 것.

국씨는 담양극장도 70년대엔 다른 극장들처럼 가극이나 창극 공연도 했다고 옛 추억담을 털어놓았다. 

특히 유명인이 출연하는 영화와 쇼가 무대에 올려 질 경우에는 택시를 임대하여 선전반을 구성하여 선전 활동에 나섰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담양 군민 여러분! 여기는 담양극장 이동선전반입니다. 방금 개봉된 따끈따끈한 영화, 총천연색 시네마 세상으로 오늘밤 여러분을 모시고자 합니다. 그리고 00월 00일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는 쟈니김, 트위스트김 등 유명가수와 배삼룡, 명창 박동진 선생이 공연을 합니다”며 “마이크를 잡고 홍보에 나서면 영화관이 미어 터질 정도로 구름인파가 몰려 일대가 마비가 될 정도였다”고 국씨는 좋은 시절을 떠올렸다.

선전반들이 주로 애용한 장소는 담양 경제와 함께 운명을 한 죽물시장.

만성교 제방에서 죽물시장 구간에서 10분간 영화 홍보 활동을 하고 나면 명성극장에서도 10분간 홍보에 나서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거대한 홍보의 장으로 변하지만 이들의 선전이 주효했던지 몰라도 장날이면 영화관에 밀려드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끼니를 거르기도 여러 차례 였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또한 공전의 히트작들이 담양극장에서 상영 될 경우 영화 포스터 부착은 필수였다는 것.

지정벽보판도 없던 시절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학교앞, 시장통, 전신주 등 빈 공간 만 나오면 영화 포스터를 부착했는데 인구가 많은 면 소재지의 경우에는 2-3장 포스터를 붙이기 위해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처럼 많은 영화팬들로 인해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지만 극장주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손님들도 많았다.

지금도 경제 한파로 인해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 당시는 어느 누구 하나 형편이 나은 이가 없던 시절이라 ‘도둑 손님’도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침투로는 여자 화장실.

지금은 수세식 화장실이어서 침투하는 것 자체가 원천봉쇄 되어 있지만 그 당시는 아래가 트여 있어 일을 보던 여자 손님들이 불청객들로 인해 기겁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미수에 그쳐 화장실로 빠진 도둑 손님도 不知其數이고 재수(?)없게 주인에게 발각될 경우, 그 넓은 영화관 청소는 이들의 몫이고 적발 전과(?)가 있는 경우에는 극장 간판용으로 사용할 페인트를 온 몸에 칠하는 행위예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대단한 유혹을 떨쳐 버리기 힘들어 도둑 손님을 퇴치하기 위해 매일처럼 각목으로 입구를 막아보지만 뒤돌아서기가 무섭게 고속도로처럼 뚫려 전담 직원을 배치할 정도로 극장주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다.

영화와 관련된 담양의 後談들도 세상에 공개됐다.

그 당시 연인들의 유일한 공간이던 극장으로 오기 위해 면에서 사는 이들이 읍으로 올 경우, 양각교 향교교 만성교를 지키던 어깨들이 영화비를 제외한 돈을 빼앗아 가난한 연인들이 영화를 보고나면 걸어서 귀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는 것.

또 잘 나가던 어깨들만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던 이들은 영화가 개봉된 지 30여분이 지나서 겨우 주인 눈을 피해 몰래 스크린 속의 배우들과 조우 할 수 있었다. 

과거 담양에는 담양극장과 쌍벽을 이뤘던 명성극장도 있었다. 지금은 청운식당 옆에 자리한 주창하임피아가 명성극장의 태 자리이다. 

담양극장의 성공을 보고 63년 5월 8일 개관한 명성극장은 출혈경쟁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 전쟁을 펼쳐기도 했지만  TV라는 ‘공동의 적’이 등장하자 손을 잡기도 했다. 

단체영화 관람의 순번을 정해 이익을 나누기도 하였지만 세월의 한계를 넘기에는 영화산업이 너무나 더디기만 했다. 이 방식으로 극복될 위기가 아니었던 탓이다. 

학생 단체관람과 관련된 뒷이야기도 세상에 국씨의 입을 통해 공개됐다.

남녀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생 단체관람은 1달에 2회 가능함에 따라 명성극장과 순번을 정해 실시했는데 예를 들어 이날 영화 관람비가 100만원이었을 경우 극장측 60%, 학교측이 40%로 나눠 가졌는데 학생 단체 관람이 있는 날이면 담양 식당에서 교사들의 단체 회식이 이뤄질 정도로 짭짤한 부수입이었다는 것.

그러나 花無十日紅 이라는 말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말부터 급속도로 보급된 TV로 인해 하나둘씩 영화관을 등지던 이들이 80년대 불어 닥친 프로야구 돌풍으로 인해 급격한 하락세를 보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돌리던 영사기를 한달에 1-2번, 명절에나 상영하게 될 정도로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담양극장에서 영화상영은 1980년대 초반까지도 띄엄띄엄 이어졌지만 결국 국 사장은 황금알을 낳던 암탉 같은 영사기 두 대를 고물상에게 팔아야 하는 상황까지 접하게 됐다. 

요즘 같으면 4000-5000만원의 값어치에 구입했지만 놋쇠로 만들어져 17만원에 넘길 수 있었고 모터와 렌즈는 별도로 50만원에 팔아 버리고 영화의 연을 접게 된 것. 

이후 1987년 7월 행복예식장을 겸한 식당으로 변모도 했지만 담양극장 만큼의 富를 국씨에게 가져다주지 못해 다 때려 부수고 다른 사업을 해볼 생각도 했지만 ‘다정도 병이다’는 말처럼 자신의 집안과 인연을 맺은 정 때문에 남겨두어 외관이나마 영화관의 형태를 유지하다 2012년 담양군에 매각되어 철거 후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종대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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