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명성극장과 아카데미 극장

 ▲ 명성극장을 대신해 둥지를 튼 주창하임피아
 

*명성극장

“명성극장은 1963년 5월 8일 문을 열었습니다”

담양극장이 담양 영화산업의 선두주자로 나서자 후발주자로 나선 명성극장이 세상에 선 보일수 있도록 벽돌 한 장 한 장 쌓는 것은 물론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비닐도 안 벗겨진 일제 영사기를 전격 수입해 17년 동안 손때를 묻혀가며 喜怒哀樂을 선물했던 박종화 영사주임이 힘있게 말한다.

명성극장의 초대 대표는 무정면 오룡리 출신으로 경찰 간부를 역임했던 박종호씨였으며 여장부로 이름난 박옥희씨와 박옥심씨가 힘을 보태 실질적 운영을 했다는 이야기도 영사기를 만졌던 박종화씨와 문영철씨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그 당시 최고 사양의 영사기를 확보했던 탓에 화제의 개봉작을 도맡아 상영함에 따라 명성극장은 후발주자 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무한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담양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 당시 영화 상영은 필름이 순차적으로 도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상영이 끝나면 광주로 오고 담양에 오면 상영 끝난 필름을 명성극장에서 하고 명성극장에서 못 트는 영화는 담양극장으로 넘어가는 구조였으며 인기 있는 영화는 시차를 두고 담양극장과 명성극장을 오가며 동시에 상영했지만 밀려드는 관람객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호시절을 구가했다.

또한 명성극장은 많은 이들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는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곳 이었으며  만화영화와 무협영화, 러닝타임 3시간에서 4시간에 달하는 大作들의 주인공들은 관객들에게 꿈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등 친구들과의 놀이 공간이자 가족과의 나들이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명성극장도 컬러TV 보급 확대는 물론 프로야구와 더불어 편의시설이 확충된 소극장들이 인근 광주시에 우후죽순처럼 생겨 나면서 충성도도 함께 옅어져 영사기가 돌아 가는 날 보다 쉬는 날이 많아지는 등 개점휴업 상태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지다가 임실 출신 사업가가 임대해서 운영했으나 이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고 건설업체에 매각 되어 현재는 주창하임피아가 명성극장 자리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 담양영화산업의 산증인 문영철 아카데미 극장 대표와 영사기능사 1급 자격증

*아카데미 극장

“담양에 광주 상무대가 이전한다는 소문이 돌았지. 상무대에서 훈련 받는 수 많은 장병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보러 전국 각지에서 찾아올 면회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큰 맘 먹고 공용정류장 맞은 편 해동 빌딩 3층에 아카데미 극장을 1988년 문을 열었지”

담양 토박이로 담양 영화산업의 산증인인 문영철 아카데미극장 대표(사진)의 소회.

전국 최연소로 지난 1967년 취득한 영사기능사 1급 자격증을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문 대표는 대한민국 영화 1번지 충무로에 자리 잡은 대한극장 소속으로 담양극장에 파견되어 영사기사 역할을 하면서 영화와의 소중한 인연을 시작했다.

영화산업이 최강의 호시절을 보이던 시절 담양극장과 명성극장이 신사협정을 맺고 불필요한 경쟁을 자제하기로 함에 따라 담양극장 소속이었지만 명성극장에서 영사기사는 물론 기도 업무까지 1인 2역을 담당했다고 회고했다.

젊은 시절 담양에서 영화산업에 종사하면서 영화로운 시대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세상의 성함과 쇠함이 서로 바뀌어 무상함을 탄식하는 서리지탄(黍離之歎)’ 처럼 영화관을 등지는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축소되는 영화판에서 문 대표도 동병상련을 느껴야 했다.

한동안 영화산업과 선을 긋고 재향군인회에서 특유의 입담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역량을 발휘하던 문 대표에게 상무대 담양 이전 소식은 인생의 마지막 기회처럼 문 대표를 들끓게 했다.

상무대 군 장병들의 발이 되어 줄 담양공용정류장 앞에 영화관을 개봉하면 예전 호시절이 다시 재연 될 것 같은 강한 믿음이 있었고 누구보다 영화라면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박학다식함은 물론 남다른 감각이 담양에서 마지막 극장이 된 아카데미 극장이 문을 열게 된 동기이다.

비록 문 대표의 예상처럼 상무대가 담양이 아니라 장성으로 결정되어 실망감도 컸지만 이미 배는 떠났고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냈던 영화 DNA는 문 대표가 3년 동안 영화관을 경영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담빛 시네마 개관을 누구보다 환영하며 담양과 관련된 영화 이야기라면 하나라도 더 들려주기 위해 고민하던 문 대표는 지난해 장마 피해가 더 컸다고 한다.

담주리 처갓집에 보관하던 영화 관련 서류는 물론 사진들이 수마 피해를 고스란히 입어 역사적 기록물들이 쓰레기가 되어 마대포대에 담겨져 매립장이나 소각장으로 직행함에 따라 문 대표의 젊은 청춘도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것.

이처럼 담양극장을 비롯 명성극장, 창평극장, 아카데미극장에서 무수하게 상영된 영화가 관객들의 뇌리에 차곡차곡 쌓여갔던 것처럼 영화에 대한 추억은 영원히 지속 된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추억으로까지 자리 잡고 있다.  /정종대 記者

저작권자 © 담양곡성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