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唯一無二하게 面에 둥지를 튼 창평극장
마지막 극장주 조상호씨 기억 되감기

 ▲ 창평극장의 산파역을 한 조상호씨와 창평극장.
 ▲ 창평극장의 산파역을 한 조상호씨와 창평극장.

영화 불모지인 담양에 담양읍도 아닌 창평面에 극장 설립을 하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들이 있었기에 창평극장의 외관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1960년 後農 김상현(6선 의원)과 막역지우였던 김종수씨가 창평에 극장을 세우기로 마음을 먹자 갓 군대에서 전역한 조상호씨가 김종수씨와 힘을 합쳐 벽돌을 나르는 막노동도 즐겁게 여기며 창평극장의 기초를 닦았다.

김종수씨가 담양읍도 아닌 창평면에 극장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비빌 언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광주 시민극장(현재 한미스파)에서 전무를 하던 작은 아버지가 영화산업의 밝은 미래를 예측하고 창평에 극장을 개관해도 경제성이 있다는 판단과 함께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창평 주민은 물론 인근 지역 주민들도 담양읍이나 광주를 가지 않아도 영화를 감상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창평시장과 연접한 곳(현재 성심의원 옆)에 둥지를 튼 창평극장 개관은 요즘 말로 대박을 쳤다.

그 당시 창평 인구가 1만명을 상회 할 정도로 두터운 시장층을 가지고 있는데다 일반 극장들보다 더 후한 가격으로 영화필름을 구해 매일 저녁 시간 단 한차례 상영했지만 250석 규모의 극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이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만원사례를 이어가 극장주에게는 경제적 도움을 주고 관객들은 문화욕구 충족이라는 상생의 발전을 이어갔다.

특히 극장 여건상 극장 전면에 개봉 영화 간판을 걸지는 못했지만 영화 홍보를 위해 필름과 함께 온 포스터를 마을 곳곳에 부착하기 위해 영사기사와 보조기사가 2인 1조가 되어 자전거 뒤에 마이크를 부착하고 논두렁 밭두렁을 발이 닳도록 누빈 결과는 극장 안을 꽉 채운 관객들로 반증됐다.

특히 한달에 2~3회 실시한 학생단체 관람을 낮 시간대를 활용해 상영할 때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마치고 시험의 압박에서 벗어난 창평국민학교는 물론 대덕국민학교 학생들이 은막을 수놓은 수많은 영화 주인공과 교류하며 꿈을 키우는 공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DJ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앞장섰던 後農 김상현 의원의 정치자금 지원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던 김종수씨의 성격으로 인해 창평극장은 겉으로는 호황이었지만 실제로는 적자를 면치 못해 경영 정상화를 위해 영입된 이가 김종수씨의 친동생 김종현씨다.

고향 창평을 떠나 순천에서 거주하던 김종현씨는 군대를 제대하기가 무섭게 형의 부름을 받고 창평극장의 살림을 도맡아 영화산업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창평극장의 산파 역을 했던 조상호씨는 김종현씨와 함께 ‘표를 안 끊고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자랑’이던 無法時代에 보안관처럼 창평극장 문지기 역할을 맡아 관객들이 영화를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도 불구하고 극장 안을 가득 메운 이들에게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아이스께끼를 판매하던 이들이 통을 메고 극장을 누빌 수 있도록 배려도 아끼지 않는 등 여름날의 더운 추억도 영화속 스크린과 함께 창평극장을 버티는 원동력이 됐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권세나 영화는 영원할 수 없다는 ‘花無十日紅’ 이라는 말처럼 영원할 것 같던 창평극장도 역사의 흐름에서 빗겨나지 못하고 70년대 말까지 극장을 어렵사리 운영하다가 영화관을 정부 양곡 창고로 활용하는 것이 경제적 측면에서 나을 것으로 전격 판단한 김종현씨로부터 조상호씨가 영화관을 인수 받았다.

지금은 故人이 되어버린 김종수씨를 비롯 故 김종현씨를 대신해 창평극장과 운명 공동체 였던 조상호씨는 83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도 자전거를 탈 정도로 정정하며 마음은 아직도 청년이다.

 ▲ 마지막 극장주 조상호씨가 영사기가 자리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 마지막 극장주 조상호씨가 영사기가 자리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영화관을 인수해 정미업을 운영하던 조상호씨는 과거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 앞을 가득 메운 곳이 현재는 약국, 치킨집, 미용실로 바뀌고 필름을 돌리던 영사기실은 장독대와 마늘을 너는 곳으로 변모했지만 영화관 뼈대는 물론 당시 사용했던 男女 화장실이 창평극장의 지나온 세월을 입증하고 있다.(사진)

조상호씨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영화광이라면 경험했을 시네마천국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전쟁 중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마리아와 여동생과 함께 살며 가난한 삶을 보내던 어린 토토는 극장에 몰래 숨어 들어와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러다가 토토는 아델피오 신부와 함께 영화검열 작업 일을 도우며 소일거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시네마 천국’ 극장의 영사기사 알프레도와 인연을 맺게 된다.

알프레도는 처음에 영사실에 들어와 성가시게 구는 토토를 귀찮게 여겼으나 토토의 영리함과 귀여움에 점차 마음을 열고 그에게 영사기 조작법을 알려주며 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이후 토토는 고향 시칠리아를 떠나 로마로 가서 살바토레라는 이름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이룬다. 

시네마천국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그의 자전적 회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감독은 실제로 1970년대 초 극장에서 영사기사로 일한 경험이 있,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극장이 문을 닫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면서 이를 영화화하고자 시나리오를 썼다.

시네마천국은 감독의 개인적인 기억에 대한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매체가 등장하기 이전 극장에서 함께 동네 사람들과 모여 영화를 보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의 향수를 담아냈다. 

과거의 극장 문화를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재현하면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노스탤지어적인 대답을 내놓고 있다.

시네마 천국속의 극장이 단순히 저녁 시간을 보내는 오락의 장소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 대화를 나누고 소식을 주고받는 만남의 장이며, 관객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수용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영화를 즐기고 해석하며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주체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묘사된 것처럼 창평극장도 본연의 업무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상호씨가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 모습에서 비록 창평극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화는 끊임없이 상영중이다.(끝) /정종대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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