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년 세월 속에 스며진 전통문화 숨결을 찾아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에는 잊혀져가고 있는 ‘정문거리’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나산(羅山)이라고도 하는데 구화공(九華公)나무춘의 후손들이 세거지(世居地)를 이루며 지켜가고 있는 선산(先山)이기도 하다. 

금성나씨남강공파문중(회장 나연채, 남강공15세손)은 매년 11월 첫주 토요일에 시제를 모시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공식적인 행사를 최소화하여 진행된 이날 행사는 금성나씨대종회와 청백리공종회의 제례(祭禮)의 절차를 토대로 홀기(笏記)를 읽어가며 진행되었는데, 요즘에는 마을마다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옛 문화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시제를 진행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날 금성나씨 나산묘사(羅山墓祀)는 집사분정(執事分定)을 통해 사전에 헌관(獻官),집례(執禮),축관(祝官),판진설(判陳設),서집사(西執事),동집사(東執事),알자(謁者),찬인(贊人),봉향(奉香),봉로(烽爐),직일(直日),찬창(贊唱)이 정해졌고, 진행순서는 개례(開禮), 참신례(參神禮), 강신례(降神禮), 초헌례(初獻禮), 독축(讀祝),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유식례(侑食禮), 사신례(辭神禮), 음복례(飮福禮), 산신제(山神祭) 순으로 진행되었다. 

금성나씨 시조 나총례(羅聰禮)는 고려 정종 때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이다. 금성나씨남강공파문중은 시조로부터 21세손인 남강공(1550~1584)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남강공은 자는 군길(君吉), 호는 남강(南崗) 천성이 총명하여 3,4세 때 벌써 글을 쓰고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한번 듣고 배운 것은 곧 잘 이를 욀 수 있어 사람들은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장성하면서 더욱 학문에 힘을 써 문장이 일세에 뛰어났고 또한 행실이 근엄하여 일시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말년에 석천 임억령과 더불어 문(文)의 벗이 되어 같이 시를 짓고 읊으며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었는데 그의 시가 「석천집(石川集)」에 실려 있다. 남강공 나덕용(羅德用)은 홍주송씨(물염공 송정순(宋庭筍)의 딸)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무송, 나무춘, 나무계 형제이다.

창주공 나무송(1577∼1653) 자는 수부(秀夫), 호는 창주(滄洲)·만취(晩翠),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문과에 급제하여 거산찰방(居山察訪)에 제수된 후 예조·병조의 낭관(郎官)과 정언(正言)·지평(持平)·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존현모의(尊賢慕義) 사상이 높아 1630년(인조 8)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부임시 먼저 효자·열부 및 이황(李滉)의 묘를 참배하였으며,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은 그를 존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또한 존명(尊明)사상이 높아 조그마한 단(壇)을 쌓아 놓고 조석으로 배향하였는데, 어느날 명나라 황제가 현몽(現夢)하여 그 단(壇)을 대명단(大明壇)이라고 하라는 계시가 있었다. 저서로는 『창주문집(滄洲文集)』이 있다.

구화공 나무춘(1580~1619) 자는 대년(大年), 호 구봉(九峯) 구화(九華) 기지(耆之) 조선시대 성균관학록, 성균관학정, 감찰 등을 역임한 문신. 1606년(선조 3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學諭)·학록(學錄)·학정(學正)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이이첨(李爾瞻)이 유생 이위경(李偉卿)을 시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대비 지위를 폐하자는 소를 올리자, 한림(翰林) 엄성(嚴惺)과 함께 이위경을 탄핵하였다. 이때 양사(兩司: 사간원·사헌부)의 반발로 말미암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나주의 향리로 돌아갔다. 3년 뒤 복직되어 감찰을 지냈으나, 다시 파직되었다.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담양의 구산사(龜山祠)에 제향되었다.

물염공 송정순(1521년~1584년)은 남강공 나덕용의 장인으로 조선전기 예조정랑, 구례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중립(中立), 호는 물염(勿染). 할아버지는 송기손(宋麒孫)이고, 아버지는 송구(宋駒)이며, 어머니는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안축(安軸)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정랑·구례현감 등을 지냈다. 성질이 충후(忠厚)하고 효성이 뛰어났으며, 재직 중에 청렴결백하고 덕으로써 정사를 살펴 이름이 높았다.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경사를 강론하였고 송징(宋徵) 등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동복(同福) 창랑(滄浪)에 정자를 세워 거기서 여생을 마친 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세거지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나항도(금성나씨남강공파문중 총무이사, 구화공14세손) 씨는 “가례준칙이 지역과 사회적 계층을 초월해 거의 보편화된 듯이 보이는 현대사회에서도 제례의 절차와 형식은 지역과 경제적 조건 등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어 보인다”면서 “우리 문중만의 제례절차를 만들어 젊은 후손(생존세대기준 현손)과 공유될 수 있는 한자표기와 한글표기를 혼용하여 관혼상례에 관한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최근들어 옛터에 표지석만 남아있는 구산사우(龜山祠宇) 복원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담양의 시가문학과 가사문학의 꽃을 피우게 했던 배향인물(노송 송희경, 눌재 박상, 면앙 송순, 물염 송정순, 서석 김언욱, 청계 김응회, 만덕 김대기, 시은 윤원호, 울옹 송징, 동악 이안눌, 구화 나무춘, 청오 임광필)에 대한 복원사업과 학술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담양의 인문학적 문화자산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고 “선인들께서 물려주신 문화유산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세대에게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 되고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역시 미래세대에 생기 넘치는 축제의 마당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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