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석(발행인)

설립 당시부터 교명 논란에 휩싸여 갈등을 초래했던 ‘송강고’가 급기야 교명 변경을 위한 주민공청회를 열고 교명을 ‘솔가람고’로 변경하는 절차를 추진 중이다. 이는 기축옥사 때 송강 정철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호남지역 문중들의 반대로 갈등을 빚어오다 급기야 교명을 변경하게 됐다.

그러면 4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학교 이름을 바꿔야 할 만큼 중대사였던 기축옥사는 무슨 사건이며 과연 주범이 정철이었을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 보자.

1589년 기축년 겨울에 벌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 전과 후 조선 정치 풍토를 갈라버린 참혹한 사건으로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하룻밤 새에 여당인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고, 그가 반역을 꿈꾸다 발각돼 벌어진 사건이다. 이후 역적 토벌을 빌미로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가 학살당하고 유배당한 참극이다.

당시 선조의 명을 받아 정여립 사건을 수사한 책임자는 서인의 당수 정철이었다. 그에 대한 한이 사무쳐 동인의 후손들은 도마질을 할 때도 '정철정철정철'하며 고기를 썰었다는 말이 전해 올 정도다. 또한 정철이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조사하면서 호남지역 선비들에게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하는 상소를 올리게 해 이를 이용했다는 소문을 두고 우리나라 최초로 ‘투서문화’를 만든 장본인이 정철이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도 이어져 온다.

그러나 기축옥사 때 선비 1000명을 학살한 주범은 정철이 아니라 국왕 선조였다는 새롭고 놀라운 사실이 조선일보 박종인 기자의 ‘기축옥사의 진실’이라는 기사를 통해 밝혀짐으로써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 기자는 이 기사에서 역사적 사실은 정철이 수사를 빌미로 정적을 떼로 제거하기는 했지만 기축옥사를 일으킨 주범은 선조라고 단정한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논리와 이성과 사람 목숨까지 초개같이 버린 국왕 선조를 주범으로 지목한다. 정여립 사건이 마무리된 후 ‘악독한 정철이 내 선한 선비들을 다 죽였다’며 정철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운 국왕 선조가 바로 주범이라고.

1589년 음력 10월 2일 정여립의 반역 음모가 선조에게 고변되고 선조는 즉시 황해도와 전라도에 금부도사와 선전관(왕명을 받은 무관)을 파견했다. 전라도 진안현감 민인백이 토역 대장으로 죽도에 은거하던 정여립 세력을 토벌했다. 관군에 포위된 정여립은 땅에 칼을 세워 목을 스스로 찔러 죽었다. 정여립 시신은 서울로 압송돼 몸이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다. 함께 체포된 다른 역당도 마찬가지였다.

정여립이 자살하고 동인으로 구성된 역적들이 대거 처형된 다음에도 선조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역모 적발 한 달 만에 선조는 전국에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렸다. 결국 상소에 의해 당시 정여립 사건 조사 책임자였던 우의정 정언신이 사직하자 다음 날인 11월 8일 선조는 고향인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을 불러들여 우의정에 임명했다. 

한사코 사양하는 정철에게 선조는 세 번이나 내시를 보내 입궐을 명했다. 정철이 병을 이유로 거듭 사양하자 선조가 “가마에 실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결국 서인 당수 정철이 정여립 역모사건의 특검단장이 됐고 향후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들이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됐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3년 동안 조선 정계를 휩쓸었는데도 그 실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꾸몄는지부터 이 모든 수사 과정을 과연 정철이 지휘했는지까지. 동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철을 천하의 모사꾼으로 표현했고 서인이 저술한 책들은 정철이 최영경을 비롯한 많은 이를 변호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선조가 정철을 앞세워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문인으로 정치가로 당대를 섭렵했던 정철에게 부정적 이미지의 상징으로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정여립 사건.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국왕 선조가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동인 선비들을 제거하고 미완의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 꾸민 참극에 정철이 이용당한 사건으로 기축옥사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이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기축옥사가 벌어진 지 40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 와서 학교 이름까지 바꿔야 할 만큼 송강 정철이 역사 앞에 큰 죄를 지었는지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역사에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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