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사건 “부패정치인의 일일뿐 우리와는 상관없어”
정치혐오증…지방자치 퇴보 염려도

‘지방자치제’에 밑거름 될 것

이정섭 담양군수에 대한 지역민들의 반응은 쉽게 대별되면서도 군수 개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반응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윤모씨(담양읍, 39세)는 “李군수 구속은 가슴 아픈 일로 덕을 베풀어야 할 시기에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게 된 점은 원인여하를 떠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며 “지금까지 지방자치제의 모순이 李군수 대에 나타난 것일 뿐 李군수를 쉽게 지탄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모씨(담양읍, 43세)도 “지방자치시대에 군수와 관련된 일은 솔직히 어느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며 “이번 일을 교훈 삼아 군수에게 청탁해 일을 쉽게 해결하려는 잘못된 관행부터 우리 스스로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공무원 A씨도 “어찌됐든 늘그막에 안됐다. 李군수가 평소 일욕심도 많고 강직한 심성이라 후배공무원들과 트러블도 많았으나 시원시원하고 전체 일을 규합하는 능력은 뛰어나 그런 점은 배울만 했다”며 “공무원 모두들 이번 일에 대해 입 밖에 내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으나 모두들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반대의 반응도 있다. 인간적인 면은 인정하나 잘못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모씨(월산면, 39세)는 “항소했다고 하는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재고의 가치 없는 일이며 한 개인의 잘못으로 담양군 전체 이미지가 추락했으니 그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는 사태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정모씨는 “李군수의 부패로 그동안 군수 측근들만 배부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동안의 지방자치제 틀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건인양 하는 것은 5만 군민을 우롱하는 처사 아니냐”며 “마무리를 법적으로 짓게 됐으나 언젠가는 군민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점은 항상 하나의 의견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정치하는 사람들 다들 똑같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지방자치단체 정치인치고 진정으로 군민들에게 한 점 부끄럼 없이 정치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반문으로 시작하며 강한 정치혐오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 주민은 “군의원이고 도의원이고 군수고 모두들 결론적으로는 개인의 공명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 아니냐”며 “실생활에 와 닿는 자치정치라고 하지만 각종 선출직들의 행보를 보면 아직도 거리가 멀다”고 한탄했다.

이에 대해 호남대 김덕모 교수(신문방송학)는 “자치단체장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면 그에 대한 지역민의 반응은 주로 허탈감이나 정치혐오감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며 “정치인에 대한 혐오감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것이나 자치단체장에 대한 혐오감은 위험한 것으로 자칫 지방자치의 퇴보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허탈감에 의한 외면보다는 더욱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시기다”고 조언했다.


‘史上 初有’

수천년의 담양 역사에서 부정부패로 인해 현직 군수가 파직된 사건은 사상 초유로 동시대를 사는 담양군민으로서는 불명예를 안게 된 셈이다.

대전면 태목리 고인돌 유적을 위시해 선사시대부터 역사를 이어온 담양이지만 지난 8월 개관한 담양종합체육관 준공 때까지도 군(郡)과 군수(郡守)에 관련된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담양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담양도호부조를 보면 “백제 때는 추자혜군, 신라 때는 추성군으로 불렸다가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담주도단련사를 두었으며 후일 다시 ‘담양’이라 했다”고 전하고 있어 郡 명칭과 관련한 변천사를 전하고 있다.

이어 “공양왕 3년(1391년) 율원현(현 금성면 일부)을 겸임케 했다”고 나오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조 4년(1395)에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켰다”는 내용이 서술돼 있다.

또 “정종 즉위1년(1398)에 왕비 김씨의 고향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시키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예(例)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는 내용도 있다.
군수나 부사의 행적은 주로 치적이 전해 오고 있으며 郡의 강등사건은 주로 반란이나 역적모의와 관련해 전해진다.

고려 고종 24년(1237년) 원율현 사람 이연년이 불량농민을 소집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 원율현이 폐현된 적이 있어(이연년의 난) 담양지역에서 나타난 최초의 폐현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무인정권 혼란기에 나타난 전국적인 현상으로 옛 백제지역의 후손들이 백제부흥을 표방하며 일으켰던 운동으로 백제도원수라 자칭했던 이연년은 해양(海陽, 지금의 광주)까지 점령하며 1232년 일어나 5년여간 위세를 떨쳤으나 나주성에 주둔하던 전라지휘사 김경손에 의해 1237년 진압됐다.

조선시대에는 성종 5년(1474년)에 창평현 출신 강구연이 현령 전승도를 능욕했다해 창평현이 폐현 당하는 아픔을 격고 5년 동안 광주에 예속당했다가 다시 복귀된 사건이 있었다.

영조 4년(1728년)에는 담양부도 현으로 강등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역적 이구가 태어난 곳이라 해 담양부에 그 책임을 물어 현으로 강등시킨 사건이며 이후 다시 부로 복귀됐으나 34년 후인 1762년 영조 38년에 조사 이홍범과 이창거 등이 역모를 꾀했다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1727년부터 4년간 담양부사를 지낸 심유현도 역모를 꾀했다 하여 영조 38년(1762년)에 함께 처형됐다.

현재 담양군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때 단행된 행정구역 개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폐치분합되기 전 창평군과 담양군은 상호 독립적이었으나 고경명 장군 등 임난 때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항거한 창의기병의 고장이라는 이유로 창평군은 산산 분해된다.

이에 따라 창평은 담양과 광주, 곡성으로 각기 흩어지게 되고 이후 쇠퇴를 거듭하는 아픈 역사를 안고 있었으나 최근 슬로시티로 선정되며 의병의 고장으로 선현의 뜻을 기리며 성장 잠재력을 키우고 있다. /서영준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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