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혈(經穴)과 경락(經絡) 분명하게 존재한다”


말을 하다 말고 나는 아직도 왼팔을 펴지 못하고 초조하게 곁눈질을 하고 있는 사내의 오른팔을 잡았다. “내가 아픈 팔을 다시 풀어주겠습니다.”

내가 말하자 그는 왼팔을 내놓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나는 아픈 팔의 반대쪽인 오른팔 곡지(曲池) 혈에 침을 놓고 유침시켰다. 사람들의 시선이 침을 놓은 오른팔에서 아픈 왼팔로 옮겨갔다.

“아이고, 아이고. 선상님.” 펴지 못 하던 팔을 조금씩 펴면서 그가 거듭 소리쳤다. 그러면서 머리를 숙여 내게 연신 절을 해댔다. 구경꾼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악스럽게 말하며 나서던 사람이 갑자기 납신대며 수그리자 구경꾼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 사람 되게 시껍하네.”, “거 참, 신기한 일일세.”, “말 한 번 잘못 했다 된통 혼났군.”

사실 곡지에 침을 놓는 것만으로 팔을 영영 쓰지 못하게 만들 수는 없다. 다만 그 혈에 침을 세게 놓으면 팔이 뻐근하고 마비된 듯 아파서 잠시 팔을 펴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내가 팔을 전혀 움직이지 못 했던 것은 최면에 걸렸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팔을 움직이지 못 하게 할 수 있는 의원이면 내 병도 고쳐줄 수 있겠다’는 바람이 작용해 팔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병에 지칠 대로 지친 사내는 자기의 병이 침으로 나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고 그래서 “야, 이 엉터리 침쟁이야” 하고 소리질러댔을 터였다. 허나 속으로는 “선생님, 제발 저 좀 고쳐 주세요” 하고 호소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이미 사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의사 앞에서 괴팍하게 구는 환자일수록 병을 고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의사가 조금이라도 믿음을 줄 수 있는 행동을 보여준다면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사람들이다. 사실, 의사와 그 치료법을 전혀 믿지 못 했다면 환자는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그 동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불러댔다. 병원 응급실이 없던 시절이니 침 놓는 의원이 응급환자를 보아야 했다. 한밤중이라도 환자가 있다고 하면 안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죽는 사람도 많이 보고 항상 불안하게 지냈다. 집안일을 뒤로 미루어놓을 수밖에 없었으니 환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각오가 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아는 환자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있었다. 환자는 나에게 선생님이었다. 의술은 환자가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지만 또한 환자가 있기 때문에 의술은 발전하는 것 아닌가.

제기동에 가면 늘 만난 시각장애인 김씨는 나에게 각별한 선생님이었다. 오십 줄에 들어서 녹내장으로 맹인이 된 김씨는 처음에 몇 번인가는 와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혹시, 저 같은 사람도 치료가 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며 다가왔다.


시각장애인 김 씨가 본 색깔은?


“처음에는 물체가 안개에 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전등불을 보면 무지개가 나타나고 하더니 점점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러다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건지 그걸 알고 싶어요.”

그런 증상이라면 청맹관, 즉 만성 녹내장일 터였다. 나는 그가 만성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고 말았음을 알았다. 나는 뜸을 오랫동안 뜨면서 청맹관을 고칠 수 있다는 치료 사례가 여러 의서(醫書)에 나와 있음을 김 씨에게 알려주면서 치료해 보자고 했다.

김 씨와 나는 그 날부터 뜸 치료를 시작했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침 치료를 곁들였는데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발등에 있는 태충(太衝) 혈에 침을 놓자 김씨가 눈에 푸른 색 기운이 돈다고 했다. 눈을 지배하는 장기가 간인지라, 간을 돕기 위해 간장의 원기가 머무는 태충에 침을 놓았던 것이다. 나는 간경(졸궐음간경-足厥陰肝經)의 원혈(原穴)인 태충에 침을 꽂아 푸른색이 나타났다면, 경혈에 따라 관계가 있는 오장의 색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심경(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원혈인 신문(神門) 혈에 침을 꽂고는 붉은 색이 나타나느냐고 물었다.

“네, 붉은 기가 보였어요.” 그가 약간 흥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오장을 잇는 각 경락의 원혈에 신속하게 침을 놓았다. 김씨는 폐경(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의 원혈인 태연(太淵) 혈에 침을 꽂으면 흰색이 보인다고 답했고, 비경(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의 원혈인 태백(太白) 혈에서는 누런색이 나타났다고 답했다. /김남수(뜸사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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