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흔히들 남을 가르치는 교사직이 아니면서도 타인의 행위에 대하여 또는 선후배 사이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 기준 속에서 지적도 하고 훈계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남을 가르치고 교화시킨다는 것은 특정 지식이나 어른스런 경험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떤 사안이든 그 훈계나 지적은 진실은 말할 것도 없이 객관적 사회 정의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더불어 사회통념상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자기의 가르침이 문제는 없는지 깊은 고민까지 함께해야한다.

만약 자신의 주관적 기준만을 가지고 타인의 행위를 지적하거나 교화하려 든다면 이것이야 말로 편견일 수 있으며 때로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래서일까, 요즘 부모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녀를 올바르게 가르치기가 정말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곤 한다.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면 자기가 낳은 자식조차도 가르치는 일이 힘들다고 하겠는가!

‘맹자’에 역자교지(易子敎之)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식을 바꾸어 가르친다는 뜻이다. 제 자식을 가르치기가 힘드니 서로 자식을 바꾸어 가르쳐 보자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가르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일 것이다.

하기야 필자의 주변에도 학교에서는 훌륭한 교사들이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불어 필자와 같은 직업을 가진 경찰관들조차도 자식들 가정교육이 잘못되어 탈선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고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디 이뿐인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후배들의 잘못을 훈계한다고 잘못 지적했다가는 당장 그들로부터 험악한 인상과 함께 “너나 잘해”라는 투의 불안한 상황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남을 선도하고 가르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선도하고 교화해야 할 대상을 앞에다 두고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특히 필자처럼 치안에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법무부 범죄예방위원들이야 말로 더욱 적극적으로 이들을 지도편달하려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럼 어떻게 이들을 효율적으로 지도할 수 있을까!

지적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그것이 선의(善意)라 하드라도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감성적으로 예민한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들에게 막무가내로 잘못만을 지적한다면 반발심리 속에서 도리어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래서 남을 교화하고 선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들 스스로 먼저 모범을 보이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에게 공부하라고 지시만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먼저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보다 더 좋은 학습 방법이 또 있겠냐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과 지식인, 그리고 각계각층의 조직원들이 청학동 이정석 훈장님의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입으로 가르치니 반항하네”라는 경구에서처럼 타인의 잘못만을 지적하기보다는 우리들 스스로 먼저 법과 질서를 지키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대하여는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 우리 사회는 저절로 밝아지지 않을까? /김신환(곡성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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