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구사는 이동식 종합병원

할아버지와 손녀의 소식은 끊겼지만 섭섭하지는 않았다. 환자들에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기 때문이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 때가 1955년이었으니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중년 여자가 침술원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선생님이 부러진 목뼈를 고쳤다는 분 맞지요?” 하고 물었다. 어떤 환자를 가리키는 것일까.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요 앞 Y외과에 입원했던 K씨 아시지요? 부부싸움 하다 목뼈 부러진 목수 K씨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성질 유별난 목수 K씨를 말하는구나. K씨는 부부싸움 끝에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머리로 벽을 들이받다 경추가 골절되어 내 침술원 근처에 있는 Y외과에 입원했던 환자이다. 나는 가슴 아래 전신이 마비되었던 K씨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주었다. K씨는 침뜸 치료로 대단한 효과를 보았다.

“저희 애아버지가 Y외과에 입원했었거든요. 근데 그 병원에 있는 환자들 말이 저희 애아버지랑 K씨랑 증상이 아주 비슷하다면서 선생님을 찾아가 보라고 해서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중년 여자는 자신의 집이 원주라면서 원주로 왕진을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난처했다. 지금처럼 승용차가 흔한 시절도 아니었으니 대중교통으로 가고 와야 할 처지일 터. 허나 대중교통 또한 지금처럼 배차 시간이 짧고 흔하지 않았다. 침술원을 오래 비울 수 없는 상황이라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국 나는 왕진을 허락하고 말았다. 부인의 부탁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일요일, 원주에 사는 환자의 집을 찾았다. 환자인 P씨는 사진사로, 원주의 한 여고 앞에서 제법 번듯한 사진관을 운영하던 이였다. 사진관이 여고에서 가까웠던 덕분에 그 학교의 공식적인 행사의 촬영은 P씨의 몫이었고 그래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운동회, 소풍 같은 학교 행사에 늘 따라다녔다고 했다.

그러던 중 수학여행에 전속 사진사로 따라갔게 됐다. 그런데 그때 학생들과 P씨를 태운 버스가 전복되는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사진사 P씨는 그 사고에서 경추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전신이 마비됐다.

내가 원주에 갔을 때 P씨는 이미 현대 의학에서는 포기한 상태였다. 이미 여러 차례 목뼈 수술을 한 뒤였고 척추가 완전히 마비되어 혼자 힘으로는 대소변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P씨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온몸에 수술 봉합 흔적이 그득했고 욕창이 말도 못하게 심해 진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소변을 인위적으로 배출시키기 위한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고 대변을 받기 위해 배출 튜브를 박은 자리에는 배설 봉지가 매달려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와중에 P씨는 정신이 맑았다.

P씨의 상태를 보면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없었다. 목수 K씨와 달리 P씨는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없었다. 사고를 당하고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고 여러 차례의 수술로 목뼈가 원래의 형태를 이미 잃은 뒤였다. 게다가 심하게 손상된 목뼈 하나는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어렵겠습니다. 다시 걷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P씨의 부인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울기 시작했고 P씨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P씨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고생이나 덜 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목뼈의 움푹 꺼진 자리를 아시혈(阿是穴)로 잡아 뜸을 떴다. 외상은 겉병이므로 오장육부의 탈과는 달리 아시혈이 매우 중요하다. 다친 자리와 아픈 자리에 아시혈을 잘 잡아 쓰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뼈는 신(腎)이 주관하므로 신장의 기가 흘러 모이는 신유(腎兪) 혈을 잡았다. 양릉천(陽陵泉) 혈에 침을 놓고 뜸을 떴는데, 이는 양릉천이 뼈와 뼈 사이를 잇는 힘줄과 힘살의 기혈을 북돋우며 근(筋)의 정기가 모이는 자리인 까닭이다. 아울러 뼈와 골수의 병증을 다스리는 현종(懸鐘) 혈에 뜸을 떴다.

P씨는 소변 배출 튜브를 박아 넣기 위해 뚫은 자리도 두 군데나 됐다. 처음에 택한 자리가 잘못 되어 튜브를 빼내고 다시 뚫은 탓이었다. 처음 튜브를 연결한 자리는 아물지 않고 계속 곪아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처음 천공(穿孔)한 부위와 튜브가 연결된 자리, 욕창이 심한 부위 주변에도 뜸을 떴다.

뜸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처가 나서 고름이 줄줄 흐르는데 또 상처를 내면 어떡하느냐면서 뜸뜨기를 꺼려한다. 그렇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뜸으로 난 상처는 번지지 않는다. 간혹 피부가 아주 약한 사람이나 무더운 여름에 뜸자리가 살짝 곪긴 하지만 화농이 깊어지거나 번지는 일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P씨의 주치의도 그랬다. “상처만 나면 낫지를 않아 걱정인데 일부러 상처를 내면 어쩌냐”면서 화를 냈다. “계속 이렇게 말 안 듣고 뜸을 뜰 거면 치료하지 않겠다며 병원에서 나가라”고 했다. 보호자들은 하는 수 없이 뜸은 뜨지 말고 침만 놓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뜸뜨기를 멈추자 아물어가던 상처에서 다시 고름과 진물이 콸콸 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것 보라”면서 “뜸자리는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자 의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후 P씨는 다시 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원주에 머무르는 날이 많아졌다. 평일에는 치료를 해 줄 수 없어 일요일에만 내려가 치료를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가 꼬리에 꼬리를 이어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로 넘어가다 결국 환자들에게 붙들려 침술원을 원주로 옮기고 말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환자를 보고 일요일에 집이 있는 서울에 올라가는 ‘별거 아닌 별거’가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오래 원주에 머무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데다가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다니고 있어 집을 쉽게 옮기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40~50년 전이니 내가 40대일 때이다. 아내와 가족을 두고 혼자 나와 있으니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곤 했다. 환자들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소문 하나는 나를 자지러지게 웃도록 만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소문의 진상은 이렇다.

나한테 자주 치료받으러 오는 환자 중에 젊고 예쁜 미망인이 한 명 있었다. 하도 상냥하게 굴어 가끔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천성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데리고 있던 간호사를 통해 들으니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열 여자 마다하는 사내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서울에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몸. 그럴 수는 없었고 사실 겁도 좀 났다. /김남수 (뜸사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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