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의 寶庫 월산면 용흥2리

▲용흥2리 초입에서 바라본 용흥사 주변의 山勢


허준 전설 끼고 도는 '아들바위 딸바위'


‘아들바위 딸바위’가 반겨주는 용흥2리. 그 깊고 큰 계곡에 들어서면 ‘여기가 달력에서 보던 알프스가 아닌가’하는 재미난 상상도 반갑다. 돌을 던져 바위 위에 돌이 앉으면 아들, 떨어지면 딸을 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아들바위 딸바위’는 부끄러운 듯 무성한 잎사귀 뒤로 숨어버렸다.

▲ 첫집 식당 건너 편에 보이는 '아들바위 딸바위'


저렇게 큰 산에도 계곡마다 계곡마다 현대사의 아픔이 있어 묵묵히 그 땅을 지켜가는 사람들은 인공 때는 인공 때대로, 군인들 들어와서는 군인세상대로 할퀴고 생채기가 나 이제야 조금 잊고 산다.

삶은 항상 그러하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초들의 삶은 그렇게 묻혀 간다. 허물고 다시 쌓고. 6.25전쟁 당시 티끌도 없이 모두 태워졌던 조선 최고의 불교사찰 용흥사는 지금도 재건이 한창이다. 지금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장성 백양사가 본사가 되어 있지만 원래 백양사는 용흥사의 말사였다.

전쟁 당시 죽림리와 가곡마을 주민들은 하나 같이 낮에는 군인세상, 밤에는 빨치산세상인 마을을 뒤로 하고 마을을 떠났다.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등지게 된 그들의 어깨에는 이불이며 먹을거리가 메여져 있었지만 마음만은 “살아야한다”는 고된 의지로 채워져 있었으리라.

마을회관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얘기다. “우리 시아버지가 얼매나 두들겨 맞았는지 나 시집가서 본게 맨날 골골 아파갔고 누워계시더라고, 아! 왜긴 왜여 빨갱이들이 죽인다금서 못살게 굴고 글고 난게 인자 군인들이 와갔고 팼샀고 그렇게 반병신이 돼븟제.”

옆에 듣고 있던 할머니도 “아이고 지긋지긋한 놈의 세상! 아! 그때 마을이 싹 피난 나갔어. 아는 데로도 가고 모른 데로도 가고, 나도 안 죽을라고 겁나 피난다녔제, 아 근디 나중에 살만한 게 저수지 들어선다고 해갔고 마을이 요로케 돼븟서.”

마을회관에 계시던 할마씨들 모두 입을 모아 “차들이 겁나 다녀! 식당 하는 사람들은 조은디 우리는 암상관 없제, 인자 몰라… 길이 넓어 진게… 쪼까 좋아질랑가.”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각시 축에 든다는 젊은 할머니가 “김대중 대통령 돌아가셨단디 고쪽으로 틀어봐”하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렸다.
순간 모든 눈은 TV에 쏠렸고 너나없이 “나이가 되믄 누구나 다 가는 것을……”하며 애틋한 감정에 젖어 들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약초 물어보든만 뭣땜시그라요”라며 김을순(77)할머니가 다가왔다. 가곡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살다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는 김 할머니는 정말 ‘이야기보따리’였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 따라서 약초 캐러 많이 다녔어. 그때는 마나 칡을 많이 캤는데 동삼(=산삼)도 많이 났지. 아이고! 그때는 난(蘭)이라는게 있나, 봐도 풀잎사구지. 난은 인제 저수지 들어서고 그 이후로 사람들이 많이들 캐갔지”라며 허준의 끄나풀과 바심재 너머 가곡과 죽림마을의 끄나풀을 이어갔다.


“원래는 우리 동네가 고금물(다래나무수액)이 유명해. 음력으로 ‘고금날’이라고 있는데 그때는 뭐 경운기고 사람이고 얼마나 많은지 걸어 댕기지를 못했어. 또 집집마다 익모초도 다들 캐놓고, 진범이라고 너덜강(돌비탈)에서만 나는 것이 있어 동그라니, 그것은 산후풍에 좋고 또 사초뿌리, 골단초 그런 것들이 있는데 지금은 이름을 다 잃어버렸어”

허준(1539~1615)에 대해 들어봤냐는 물음에는 가우뚱. 한참동안 무르익었던 허준과 용흥2리와의 연관은 거기서 멈추는듯했다. 이때 마을이장이 “예전에 마을어른이 자신이 들은 바로는 ‘허준이 바심재 넘어 약초 캐러 많이 다녔다는 말을 윗대 어른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용흥사 주변에는 많은 암자를 비롯해 임시거처가 많았다. 불심(佛心)을 기르기 위해 수도를 하는 이들이나 몹쓸병에 걸려 불심을 빌리기 위해 절을 찾은 사람들이 절 주변에 작은 거처를 마련해 놓고 용흥사가 제공하는 절밥을 얻어먹으며 연명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도 암자터나 토굴터가 많아 쉽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이와 연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바로 조선 영조 때의 숙빈 최씨 이야기다. 본래 창평현에 살던 숙빈 최씨는 역병이 돌아 부모를 여의고 이곳 용흥사 주변 암자에서 기거하다가 꿈에서 부처의 계시를 받고 나중에 숙빈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검증된’ 이야기다.

이를 유추하면 용흥사 주변에는 중생구제를 위한 절의 시혜를 받기 위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찾아 들었으며 이중에는 환자부터 오갈 데 없는 고아 등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는 추론이 나온다.

만약 용흥2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허준이 용흥사를 자주 찾았다면 절 주변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활동했을 것이고 또 계곡이 깊은 용흥사 주변에서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그러나 아직은 스승 밑에서 의술을 익히는 수련의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준의 어머니인 영광김씨가 담양 어디에서 살았는가를 명확히 할 수 없어 왕래가 많았던 미암 유희춘과 가까운 거리인 창평현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담양부에서 살았는지를 알 수는 없으나 허준의 친모가 담양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조선시대 풍습에 의하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분명 외가에서 컷을 확률이 높으며 실제 허준은 소실의 소생으로 친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은 더욱 낮다. 소실이 정실이 있는 본가에서 출산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허준이 담양에서 성장했으리라는 결정적인 단서는 미암 유희춘(1513~1577)과의 교류이다. ‘미암일기’로 유명한 유희춘은 그의 일기에서 30여 차례 ‘허준’이란 이름을 남겨 놓았다. 이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죽기 전 10년 동안(1567~1577)의 행적을 빠짐없이 남겨 놓은 것으로 이 일기를 파악하면 적어도 유희춘과 허준은 서로 한양으로 올라와 활동하기 전부터 아는 사이임에 틀림없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김시흡이 담양에서 올라 왔는데 허준의 외삼촌이더라” 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반증하면 유희춘이 “허준도 담양출신인데 담양에서 올라왔다하니 허준을 아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김시흡은 “나는 허준의 외삼촌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가정이 나온다.

또 한 가지 가정은 처가가 담양으로 담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담양사람들을 많이 아는 유희춘이기에 김시흡은 서울에 갔을 때 일부러 세력가이자 친분이 있는 유희춘을 찾아 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여기서 유희춘은 평소 가깝게 지내며 담양출신임을 알고 있는 허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며 김시흡의 대답으로 그가 외삼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따라서 유희춘은 담양이라는 연결고리로 김시흡과 허준을 각기 기억하고 있었는데 김시흡의 방문으로 “김시흡이 허준의 외삼촌이더라”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에도 불구하고 허준의 유년기와 성장기를 알 수 있는 행장 등 명문의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 출생지와 성장지에 대한 각종 설들이 분분하다. 단, 미암일기에서 32세 또는 33세에 관직에 나가기 전인 허준의 30세부터 36세(1568~1574) 때의 행적이 30여 회 거론되는데 허준의 학문적 조예를 높이 사며 허준으로부터 책을 선물 받아 기뻐하는 대목이 나온다.

결정적으로 1569년 유희춘 얼굴에 난 종기를 허준이 지렁이 즙을 바르게 해 낫게 했는데 이 일로 미암 유희춘의 신임을 받았고 미암은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 내의원 첨정으로 관직에 나가게 됐었음을 미암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허준의 궤적을 보면 유희춘과 이미 담양에서부터 아는 사이였으므로 외직을 마치고 경직을 받아 담양에서 도성으로 올라간 유희춘의 집에 자주 들러 그와 교류를 이어갔으며 이는 허준이 한양으로 올라가기 전부터 이미 의술이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를 구전과 연결하면 허준이 의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수련과정을 거칠 수 있었던 것은 용구산과 병풍산, 삼인산을 끼고 있는 용흥사 주변에서 많은 환자를 돌보며 수련의 과정을 거쳤고 많은 약재를 구할 수 있었던 환경적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훗날 선조의 죽음(1608. 2)으로 탄핵을 받아 평안북도 의주로 귀양 갔다 돌아오는데 그 기간(1608. 2~1609. 11) 동안 일생의 활동과 현지에서의 연구로 1610년 그 위대한 <동의보감>을 저술하게 된 점도 성장기 허준의 궤적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이처럼 의술이란 민초들의 삶과 가까이 하고 있을 때 발전하게 된다. 즉 성장기의 허준이 담양에 있었다면 용흥사 주변에 모여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스스로 발전했을 것이고 의주 귀양시절에는 관북지방의 험난한 삶 속에서 민초들을 돌보며 또 성장했을 것이다.

허준과 용흥2리와의 연결은 추론에서 시작해 추론으로 끝이 났지만 언젠가는 “허준의 태생지이자 성장지는 담양”이라는 점이 확실해 질 것으로 믿으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용흥2리는 현재 죽림마을일부와 가곡마을로 형성돼 있다. 죽림2제가 만들어지며 죽림리 대부분은 수몰됐다. 마을회관은 올해 지어져 마을어른들의 사랑방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마을이장 김형준 씨는 “입으로만 전해져 오는 허준과 마을의 연관성을 복구해 대한민국 최고의 약초 허브마을을 만들고 싶다”며 마을 발전에 대한 비전을 보였다.

마을 사람 대부분 “저수지가 생겨 논농사 짓기는 좋아졌다”며 반색하나 반면에 계곡을 이용해 식당을 운영하는 가구들 빼고는 논농사 외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할머니들 모두 “뭐하게 그런 걸 물어봐. 오늘 내일 하는데”라며 서거 정국에 접어들어 앞으로의 일에 시큰둥한데 마을이장은 “지금도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오는데 저수지 주변에 가로등이 없어 매우 위험하다”며 가로등 설치를 간곡히 원한다.

올 여름 휴가철에 비가 많이 와 별 재미를 못 보았다는 식당가는 이미 내년 여름을 기대하지만 아직 뜨거운 볕자락은 길기만 하다.


▲ 새롭게 확포장된 마을진입로

▲올 봄 문을 연 마을회관

▲용흥2리 마을회관 건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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