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산속에 많은 이유"

사찰은 위치에 따라 평지가람 형, 산지가람 형, 석굴가람 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평지가람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고 있으며, 왕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로 건립되어 불교의 대중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석굴가람은 천연 또는 인공의 석굴에 건립하는 사찰로서 주로 기도를 위한 도량으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고 인도와 중국에 많이 있었던 형태이다.

산지가람은 신라 말에 도입된 선종의 영향과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수도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입지여건상 평지가람보다는 소규모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대부분의 사찰이 산 속에 있고, 절이 산 속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기까지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는 산악신앙 때문이다. 국토의 시원지를 백두산으로 삼는가 하면 나라를 세운 국조들을 점지한 것은 모두 산신이었고, 그 국조는 죽어서 산신이 되어 나라를 지켜준다고 우리 조상들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궂은 일이 있거나 가뭄이 들었을 때도 산신을 찾아 기도하고 기우제를 지내면서 산신에게 운명을 맡겼다.

이런 산악신앙을 토대로 금강산 · 오대산 · 남산 등 우리나라의 명산들은 거의 불보살의 이름을 붙여 그 산에 불보살이 머물러 있는 성지로 발전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산 속에 절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둘째,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의 발로로 산지가람이 많이 창건되었다. 왜구의 침략과 관련되어 창건된 금정산 범어사, 토함산 석굴암, 백제와의 국경인 지리산에 있는 신라의 사찰들은 조국을 지키려는 의지가 불력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셋째, 불교의 초세속주의 경향을 들 수 있다. 세속적인 출세나 행복보다는 해탈과 도를 구하려는 불교의 가르침 따라 수도처로서 적합한 산 속에 사찰이 위치하게 된 것이다.

넷째, 신라 말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즉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 비보는 도와서 더하는 것을 말함)의 영향력을 들 수 있다. 산천비보란 기력이 쇠진한 땅에 기운을 더하여 줌으로써 튼튼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지형이나 자세는 국가와 개인의 길흉화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적절한 보익이 필요하다고 설하였다.

그밖에도 지리쇠왕설I(地理衰旺說), 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은 땅에도 쇠약함과 왕성함, 순조로움과 어긋남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체에 쑥을 놓아 뜸을 뜨듯이 절과 탑을 쑥으로 삼아 쇠약해진 곳에 뜸질을 하면 삼재가 가시고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보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절터를 선정하였다. 이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을 신봉한 왕건은 고려시대 500년 동안 도선국사가 지정한 산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다.

다섯째, 가장 직접적인 이유로 조선시대의 배불정책(排佛政策)을 들 수 있다. 태종은 전국의 사찰 가운데 242개만 남겨두고 폐사하였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세종은 36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성종은 도성 안의 염불소와 비구니사찰 23개를 헐어버리고 환속시켰으며, 연산군은 승려들의 무조건적인 환속과 함께 살생의 동조자로 삼기까지 하였다.

이런 억압은 개화기까지 계속되어 유생들의 횡포로 이어지고, 왕릉을 돌보거나 왕족의 원찰(願刹) 이었던 몇몇 사찰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 속으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그것이 500년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사찰은 산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손혜경(전남과학대학 교수)


▶ 손혜경 교수는 現 전남과학대학교 호텔칵테일과 교수,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가(일본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담양곡성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