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질병과 처방 알 수 있는 귀한 자료
▲ 신평마을 전경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 신평(莘平)마을.
무등산에서 광주호를 지나 송강을 타고 고서와 봉산의 너른 들판을 가는 동안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 붙은 와우리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평산(平山) 신씨(申氏) 집성촌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신평마을이다.
신평마을이라 하여 본래 이곳이 신평 송씨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라 그렇게 이름 지어진 줄 알았는데 한자(漢字)가 달랐다. 이곳 신평마을은 莘(긴모양 신)에 平자를 써 ‘신평’이라 하고 있었다.
마을 유래가 담긴 비석을 찾아 보니 “마을은 본래 莘野(신야)라 했다”는 문구를 찾을 수 있어 본래 ‘긴들 마을’(사투리 발음대로는 ‘진ː들 마을’, 野나 平은 ‘들’을 나타낸 한자어)로 불리던 것을 한자어로 바꾸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신평마을 뒤편 너른 들판은 그 유명한 ‘와우딸기’가 집중적으로 생산되는 곳으로 신평마을에서만 한 해 억대 수입을 올리는 농가만 4가구 이상이며 이런 풍부한 재원을 바탕으로 당대에서만 이 마을에서 배출된 박사가 6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좋은 풍수를 점지해 후손이 번창하도록 정착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구한말 한의학자 무애(無崖) 신성규(申成圭) 선생(1835~1918)이다.
무애선생의 4대 손인 마을이장 신대섭 씨에 의하면 무애선생은 의학에 조예가 깊어 많은 환자를 치료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많은 부를 축적, 후손을 위해 정착할 곳을 찾던 중 처음에는 전북 무주에 정착하였다 한다.
그러나 산세가 험하고 일이 많던 무주에서는 자손들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주해 현재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에 정착했었다.
그러나 그곳 또한 너른 평야는 있었으나 큰물이 지면 마을까지 물이 차 다시 정착할 곳을 찾아 나선 곳이 바로 현재 봉산면 신평마을이라 한다.
마을에 정착한 무애선생은 대숲으로 둘러싸인 15000여 평의 마을에 나무를 심으며 기존 가옥을 인수하고 현재 마을회관 앞 방죽을 만들어 수리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심은 나무들이 백일홍과 은행나무들로 2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며 마을의 보물로 여겨지고 있다. 또 무애선생의 아들이 지은 마을회관 옆 정자는 왕버들나무를 벗한 채 아직도 건사하며 정자 상량에 적힌 상량문 또한 또렷하다.
마을을 둘러본 뒤 신대섭 이장을 따라 연가정(蓮家庭)이라 이름지어진 고택을 들러보았다.
이 가옥은 집성촌인 이 마을에서 제일 귀하게 여겨지는 곳으로 사당과 제실 등이 들어선 곳이다.
바깥대문과 행랑채, 안대문, 쪽대문까지 갖춰진 집안구조는 한 눈에 다 들어 올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이를 미루어 당시 무애선생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 정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연가정의 정취는 대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내려다보는 형국이 매우 아늑해 후손을 위한 선대의 따뜻한 보살핌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이 연가정 내에는 사당과 정자가 있는데 조선시대 가옥의 배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였다.
가옥 내 정자는 덕중정(德中亭)이라 하는데 정자 안에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송판에 서각된 편액이 아닌 한지에 붓글씨로 쓰인 유리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 액자 속 글의 유래 또한 범상치 않았다. 액자 속의 글은 신대섭 이장으로는 4대조 할머니되는 분의 친정아버지가 시집간 딸에게 보낸 편지로 그 애틋한 마음을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액자에 넣어 정자에 걸어 두었다 한다.
통신과 교통이 발전하지 못한 1800년대 말의 귀한 편지를 대하고 있자니 부녀지간의 애틋한 정이 아직까지도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그러나 신씨 가문의 이러한 귀한 유물에도 불구하고 정녕 찾고자 하는 의서는 아직 찾지 못해 이장에게 묻자 책은 지금 따로 보관하고 있으며 관리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의서와 진료기록은 약 150여권으로 대대로 집안 어른들에 의해 소중히 모셔져 오다가 책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아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신대섭 이장을 함께 찾은 담양군청 윤재득 씨는 “집안 보물로 전해져 오다 발견된 서적들 중 종종 귀한 자료가 되는 경우가 있다”며 “현재 책이 보관된 곳을 찾아 정확한 진단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장님에게 들은 설명만으로도 무애선생이 활동한 1840~1900년 경 이 지역 민초들이 격은 질병과 처방된 약의 종류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신대섭 이장은 “방대한 양의 의서이기에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지 못하고 또 보관을 소홀히 한 것 같아 안타까웠는데 담양군청에서 이렇게 찾아 주어 고맙다”고 한 뒤 “의서의 문화적 가치와 희귀성이 정확히 감정되어 앞으로 후손들에게도 잘 전수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담양군청 윤재득 씨는 “유물에 대해 일반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아 벽장 속에서만 숨 쉬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유물의 가치는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때 더욱 빛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행정에서는 주민들이 유물을 더 잘 보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으므로 이번 의서도 책의 종류는 물론 종이의 질, 내용 등 관련된 모든 것을 모두 파악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서영준 記者
▲ 왕버들나무와 마을정자 무본정. 무애선생 아들이 지었으며 상량문이 오롯하다.
▲ 연가정 명비
▲정면 5칸, 측면 3칸의 300년 된 가옥.
▲ 마을 앞 무애선생의 묘소와 그가 심은 배롱나무가 보인다.
▲ 덕중정
▲신대섭 이장. 연가정은 철저한 보안이 이뤄지고 있었다.
▲ 무애선생이 물려준 의서들. 150권 가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