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 꿈 넘어주던 용면 ‘비호재’

호랑이해를 맞아 담양과 호랑이의 인연을 찾아봤더니 “영낙없이 호랑이네!”하는 산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담양의 심심계곡에서는 아직도 호랑이에 대한 전설이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용면 비호재飛虎峙는 청운의 꿈을 가진 선비들이 등용문登龍門처럼 여긴 전설이 오늘날까지 새근새근 이어진다.

▲ 비호재 정상에서 바라본 추월산 상봉. 마치 닭벼슬처럼 벼슬 모양이다. 비호재의 다른 이름은 ‘벼슬재’이다.

선비들 꿈 넘어주던 용면 ‘비호재’

지금은 재를 넘는 새 길이 넓기도 해 고갯길 면모는 사라졌다 해도 추월산 상봉을 바라보며 의롭게 넘던 옛길의 참맛은 아직도 의연하다. 재에 올라 담양읍 방향(남쪽)을 바라보면 담양의 평야는 물론 멀리 무등산이 한 눈에 들어와 선비의 호연지기는 이곳에서 가늠하리라.

이제는 시대가 좋아 용면사무소에서 차로 오르면 1~2분이면 넘을 수 있는 이 비호재는 담양뿐만 아니라 창평, 광주, 옥과, 화순, 나주 등지에서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 옛날 사람들은 재를 넘기 전 이곳 용면 면소재지에 있던 주막에서 목을 축이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재를 넘었으리라. 현재 용면사무소는 일제강점이 시작되던 1911년 두장리 545번지에 신축하였으나 1915년 화재로 소실하고 민가를 빌려 쓰다 1924년 현 위치에 새로 준공했다.

이 자리는 옛 기록에 ‘비호치점飛虎峙店’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마을은 물론 실제 통행인파가 많아 이들을 상대하는 점방이 성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호재를 넘으며 바라보는 추월산은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로 그 형국은 남쪽에서 바라보면 도사가 누워있는 수도자의 상이요 남동쪽(금성산)에서 바라보면 활기 있게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이다. 또 북동쪽에서 바라보면 세상을 집어 삼킬 듯 포효하는 백수의 왕 사자의 모습이요 북서쪽에서 바라보면 친근하고 온순한 호랑이의 등허리 모양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추월산은 수도승이 누워있는 형국으로 이 수도승이 수도를 마치고 일어나면 대한민국이 세계 초일류국이 된다”하여 일본인들은 추월산 상봉에 그 수도승의 혈맥을 막기 위해 쇠말뚝 5개를 박았다 한다.

<정감록>은 현재 안면(재너머, 재안)을 두고 “전쟁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조선 10대 은거지”라 했으며 통일신라시대 추성군(현 담양군의 전신)의 읍지로 추정되는 추성리와 그 근방을 두고 “바심재 너머 담양쪽(동남쪽)으로 십 마장쯤에 명당이 있고 원율리 들에는 십만 명의 군사를 먹일 큰 가마솥이 묻혀 있으며 하늘을 떠받힐 대들보가 묻혀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도 용면사람들은 용북과 용남 또는 재너머, 재안으로 용면을 나눠 말하고 있으니 댐이 생기기 전 자리하던 마을들이 정말 산 속 깊은 마을이었던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추월산을 두고 “부의 동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 도시의 배경이 되는 큰 산)이다. 석벽이 깎아 세운 듯 사방으로 둘렀는데 마치 성과 같다. 둘레가 9천 18자요 서북방으로만 보행자가 통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시내가 둘러 흐르고 또 13개소의 샘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빨치산 토벌을 위해 추월산 아래 모든 마을이 불태워졌으며 1952년 수복 후에도 산성리 구암마을과 성내마을, 월계리 진수동, 신령동, 용연리 세룡동, 상암, 조약실, 용치리 장자동, 쌍태리 삼태마을 9개 마을은 황폐화됐다.

게다가 1973년 제1차 영산강종합개발로 담양호가 축조돼 비호재 너머 마을과 옛길, 시내, 샘은 물론 산성리와 월계리 황등, 구복리, 청흥리 낙천마을, 부흥마을, 청수마을, 용연리 일부 마을 등 279가구가 수몰돼 현대사의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가슴 아픈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지금은 ‘항아리카페 앞 삼거리’로 많이 아는 ‘비호재(飛虎峙)’는 담양군 용면 추성리와 도림리의 경계로 옛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굽이굽이 산을 오르는 고갯길이었다.

담양호 축조로 재 너머 옛 길을 알 수는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서북방으로만 보행할 수 있다”한 것이 예전에도 금성면 대성리 바람골(=바람통: 받+안+골 ‘받’은 ‘산’을 뜻하는 옛 말. 산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에서 올라온 길과 비호재를 넘은 길이 도림리에서 만나 현재 수몰된 마을인 청흥리와 낙천마을, 산성마을을 가로질러 외길로 용평 삼거리를 지나 용치리 하늘재까지 통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호나 돼서 날아야 넘을 수 있기에 비호재라 했을까 아니면 산이 깊어 호랑이가 넘나들기에 비호재라 했을까. 지금은 눈높이를 맞출 수 없지만 재에서 올려다본 영산강 시원 추월산 정기는 높고도 무섭지 않으며 거칠어보여도 어머니 품같이 안아 주는 맛이 있다.

재를 넘으며 보이는 추월산의 형국이 닭의 벼슬 같아 벼슬재라 했는지 고갯길 굽이굽이가 벼슬 같아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벼슬 한 자리를 할라치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기에 벼슬재라 했는지 비호재는 ‘벼슬재’라는 별명이 있다.

이 비호재는 호랑이와 벼슬 둘 다 연관된 설화가 있으니 그 사연조차 따스하다.
그 옛날, 임금님께 올라가는 진상품 행렬뿐만 아니라 정읍, 전주로 가는 부보상, 한양으로 시험 치러 가는 선비 등 서울로 올라가는 주요 통로였던 비호재.

그중에서도 과거에 응시하러 가는 유생들과 부보상들은 꼭 비호재를 통했다. 유생들은 벼슬재인 비호재를 넘으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믿음이 있었고 부보상들은 비호재를 넘으면 시간이 단축돼 좋은 물건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은 유생이라면 비호재에 올라 산신령께 기도를 올려 합격 여부를 점치는데 이때 큰 호랑이가 나와 고개를 동서로 가로질러 날면 과거에 급제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길로 집에 돌아가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이 소리를 들은 옥과에 사는 김참봉 아들은 비호재를 찾아 12번이나 기도를 올렸는데도 호랑이는커녕 고양이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만날 술과 여자만 가까이하고 책과는 담을 싼 처지에 그러기도 했을 터.

어느 날은 자신의 그런 한심한 작태가 부끄러웠는지 깊이 반성하고 3년간 집을 떠나 토막土幕을 짓고 하늘을 보지 않으며 하루해가 짧도록 공부에만 매진했다.

그런 그의 진심을 안 호랑이는 과거시험이 잡혔는지도 모르고 움막에서 공부만 하던 김참봉 아들을 등에 업고 한양까지 날아 과거시험을 보게 해 급제토록 했다.

그런 호랑이에 감사한 아들은 귀향길에 비호재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를 올려 호랑이를 기렸으며 이에 감화한 호랑이가 또다시 하늘을 날았다는 훈훈한 이야기로 담양의 호랑이는 그 마음마저 정이 간다.

끝으로 우리 담양 곡성 지역 고등학생들도 지금은 비록 재는 깎이고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김참봉 아들처럼 공부한다면 굳이 호랑이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시험에 반드시 합격하리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 용면사무소

▲ 비호재 옛길. 지금은 폐도구간이다. 철탑 옆으로 추월산 상봉이 보인다.

▲ 비호재로 들어서는 옛길에서 바라본 추월산 상봉은 딱 ‘벼슬’을 연상시킨다. 송전탑 옆이 추월산 상봉.

▲ 비호재로 오르는 옛길과 새길 가운데서 바라본 추월산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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