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남산 호랑이 사냥과 운산리 형제사냥꾼 이야기
▲ 광주방송 ‘좋은이웃 밝은동네’ 시상식장. 담양군 대덕면 운산마을이 으뜸상 다음인 버금상을 수상했다. 대덕면이 고향인 前 전남도 박재영 행정부지사와 함께 기념사진 촬영. (사진출처-용산초등학교총동문회)
예나 지금이나 산이 많고 깊기도 한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는 1910년~1920년경까지 호랑이가 출현해 사냥꾼들이 호랑이를 사냥했다 한다.
실제 2002년 담양군향토문화연구회가 발행한 <담양설화>를 보면 대덕면 용대리 마을사람들에 의해 ‘형제 호랑이 사냥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 ‘형제 사냥꾼’ 이야기 말고도 호랑이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형제 호랑이 사냥꾼’ 이야기는 무정과 대덕, 남, 창평을 잇는 산야가 크고 웅장해 호랑이가 서식할 수 있는 먹이사슬이 충분히 이뤄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어서 1920년대까지 대덕에서의 호랑이 사냥이나 출현은 얼마든지 개연성이 높다.
이 ‘형제 사냥꾼’은 대덕면 운산마을에 거주하는 김씨 삼형제였다고 전해지며 화승총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로 추정된다.
그들이 살았다는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는 지금도 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로 현재는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돼 도농교류에 앞장서고 있으며 우리콩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소득증대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산이 깊어 한편으로는 못 된 일도 벌어진다. 전문 도박꾼들이 산 속 깊은 곳으로 찾아 들고 특히 개싸움꾼들은 도박장을 벌여 투전을 벌이다 몇 해 전 모두 체포된 적이 있다.
<타오르는 강>의 저자 문순태 씨가 자신이 살 집을 짓고 그곳을 ‘생오지’라 했는데 거기보다도 더 깊은 곳이며, 담양에서 가장 먼 곳이자 화순에서 가장 먼 곳이다.
조선 영조32년 병자년부터 영조35년 을유년(서기 1756. 4~1759. 4)까지 담양부사를 지낸 이석희李錫禧 씨가 담양에 재직하면서 그 이전에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편집 발행한 <추성지秋成誌(1758)>를 보면 현재 운산1구 저심마을은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답곡면畓谷面 저심리楮深里로 당시 27호가 살았다 한다. (저심은 楮深과 猪深 모두 보이며 ‘제심’이라고도 한다)
또 운산2구인 산정마을은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대곡면大谷面 산직리山直里로 기록돼 있으며 34호가 살았고 이후 대면大面 산정리山亭里로 바뀌었다.(1912년 마을조사)
그러다 조선총독부령 제98호(공포 1913. 12.29)에 의해 대면大面과 덕면德面이 합해져 대덕면大德面이 되었으며 이때 운산雲山이 보이기 시작한다. (추성지에 의하면 德面이 된 답곡면은 발행 당시에도 덕산德山이라는 이름이 병기돼 있다. - 今德山)
산이 많아도 논이 계속 이어져 그 옛날에도 마을이 있었던 운산마을. 이 운산마을에 살던 삼형제 호랑이 사냥꾼 이야기는 전설이 돼가고 있다 해도 흥미는 진진하다.
삼형제 모두는 건장했으며 그 중에서도 덩치가 컸던 둘째는 발이 너무 커 고무신을 신지 못 할 정도여서 짚신만 삼아 신어야 할 정도로 팔척장신의 거구였으며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해 꼭 ‘거인상’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게다가 호랑이와 결투를 벌인 후에는 그 호랑이 발톱에 긁힌 상처 때문에 외모가 더욱 흉측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호랑이 사냥에 나선 형제는 형이 먼저 호랑이를 발견하고 총을 쏘았으나 빗맞는 바람에 호랑이가 더욱 사나워져 형제는 위태로워졌다. 날카로운 발톱에 무시무시한 이빨을 어르렁 크르렁, 그야말로 ‘선불 맞은 호랑이’였다.
그러나 둘째동생은 닥치는 대로 휘갈기는 호랑이를 상대로 격투를 벌였다. 장손인 형을 위해 몸을 바친 것이다. 바위 위에 올라 호랑이 등에 올라 타 몸부림을 치며 힘을 빼놓고 힘을 못 당한 호랑이가 내빼려 하자 다시 한쪽으로 몰아 형이 다시 총을 놓을 수 있게 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어렸을 적 사냥 후 자랑삼아 정자나무에 걸어 놓은 호랑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전해져 사실성을 더하며 적어도 담양에서는 1910~1920년대까지 호랑이가 존재했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데다 호랑이 사냥도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은 또 있다. <청죽골의 비망록>을 보면 1929년 12월 30일 담양읍 남산 뒷산에서 潭陽邑 鄭相鎬, 李來春 두 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죽골의 비망록>은 당시 활동했던 포수로 鄭容駿, 鄭相鎬, 鄭湧寅, 姜宗元, 鞠像鉉, 鄭奇然, 鄭均植, 韓大連, 姜宗津, 鄭昌然, 李來春. 金짜치 씨를 기록하고 있다.
이 남산이 있는 남산리南山里는 본래 조선시대 潭陽府 동변면東邊面으로 남산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 너른 들이 있는 마을로 1914년 동정리 일부를 편입하여 남산리 또는 남촌이라 해 담양읍潭陽邑으로 했다.
그러나 남산리 너른 들은 담양읍 외곽도로가 생기며 한 번, 88고속도로가 지나가며 한 번, 국도24호선이 지나며 또 한 번, 이렇게 세 번이나 허리가 잘려 그 본연의 모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는 88고속도로가 폐지되고도 일반도로로 사용돼 철거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남산南山의 명칭 유래는 金城山城의 內城에 있는 大將廳에서 볼 때 남쪽에 위치했다 하여 南山이라 이름하였다는 설과 일반적으로 도시의 아랫녘(=남녘)에 위치한 산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남산은 금성산성 대장청의 제1봉화대로 쓰이기도 했으며 봉우리는 옥녀봉玉女峰이라 한다.
지금의 오층석탑 남쪽에 동정사가 있었는데 약 200년 전 金城山城으로 옮겼다고 전하며 武貞面 오실(現 담양읍)로 넘어가는 무잿등 서남쪽에 城隍檀 터가 있었고 당초 향백동 미산마을에 있었던 南喜亭은 88올림픽 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이 마을로 1983년 5월에 옮겨졌다.
黃鍾林 부사가 1857년 창건한 南喜亭은 본래 관어정과 마주보고 있으며 현재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돼 있다. 南喜亭은 봄에는 꽃과 새(花鳥)를 즐기고 여름에는 양샘에서 더위를 씻을 수 있으며(避暑) 가을철에는 당뜰(당똘, 들=뜰, 남촌들은 당똘, 아랫당똘, 윗당똘, 어사리뜰)의 관풍(觀豊)이 좋아 풍년의 경치를 즐기며 촌로들이 쉬도록 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여기서 잠깐 ‘양샘’(세칭 땀샘, 땀시암)을 살펴보면 황종림 부사가 南喜亭을 지을 때 발견했다하나 그 이전부터 효험이 유명해 많은 사람이 찾아다 하며 아무리 가뭄이 심하더라도 시원한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특히 여름철에는 땀띠를 없애는 효과는 물론 피부병에도 좋아 인근 고을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 북새통을 이뤘다. 이에 남희정이 생긴지 근 120년 만인 1970년 3월, 당시 민경기閔慶基 담양군수가 이를 알고 주위 일대를 정리해 세면장과 세탁소, 우물통과 우물 장옥을 갖추어 그간의 불편을 개선했다하나 지금은 길이 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산리에는 1951년 鞠묵담선사가 백양사로부터 이곳에 이거해 민가 1동과 밭 4필지(1985평)를 매입하고 25평짜리 목조 다섯 칸의 법당과 22평의 행랑 4칸을 건립해 지금의 용화사를 세웠다.
남산리에 일부 편입된 동정리는 조선 숙종조 정유년(1717)에 폐한 축요루祝堯樓가 있었던 마을로 객사 동편에 있었기 때문에 동정자리 또는 동정리로 부르게 되었다. /서영준 記者
▲ 양샘(일명 땀샘)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 남산리 마을 앞 선돌.
▲ 남산리 마을비와 마을회관.
▲남산. 산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 현재 남희정. 담양읍 외곽도로, 국도 24호선, 구 88도로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져 ‘박물관 박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정자문학의 산실’, ‘정자의 본향’을 추구하는 담양으로서는 심각히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 운산마을회관
▲ 운산마을 입구 전경
▲ 마을 앞 석벽. 효자비와 장승, 범죄 없는 마을비가 서 있다.
▲ 마을 안산과 마을 전경.
▲ 우리콩영농조합법인 전경
▲ 운산마을 가장 깊은 곳-송산골. 송산골에는 식당과 민가 2채가 있다. 그 위로 태권도센터와 송산저수지가 있으며 저수지 바로 옆에는 축사와 절이 생겼다. 사진은 송산저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