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환(본지 편집자문위원)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라”는 말은 사람을 경계하거나 의구심을 가져야 할 때 혹은 안전이 필요한 경우나 혐오 등으로 인하여 그 대상을 가까이 하기 거북한 경우에 흔히 쓰이는 부정적인 언어다.

이처럼 “거리를 두라”는 말은 부정적 요소가 강하지만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에도 음양이 있고, 세상일에도 악과 선이 있듯이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언젠가 절로 손뼉을 치면서 보았던 칼랄지브란의 “예언자” 중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는 글의 의미는 여기서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거리를 두라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끝없는 배려와 사랑일 수 있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는 너희들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 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여기에서 거리를 두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람은 늘 자유로워야 하며 개인의 자유와 영역은 어떤 경우에도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전깃줄에 앉는 제비도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여 옆으로 한 마리의 제비가 앉을 공간을 남겨두고 앉고 , 동물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공간을 인정해 임계거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랑하고 절친한 관계라도 그리고 더없이 존경한다 해도 예절이 결략되거나 적당한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결례가 되고 지나침이 되어 서로의 불편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더불어 사회악에 있어서도 더러는 악 나름대로의 공적이 있을 수 있으며, 선은 선 나름대로의 폐단이 있을 수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이치가 반드시 일방적으로만 흘러가진 않는다는 말이다. 하기는 이래서 무슨 일이건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철인들조차도 편향적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했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올해는 열린 사고로 칼릴지브란의 "함께있되 거리를 두라"에서처럼 우리는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 쪽의 잔만을 마시는 편협함은 버리고 우리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진정한 사랑으로 거듭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작권자 © 담양곡성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