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서원 정기받은 교육지구 향교리

▲ 마을과 죽녹원을 경계 짓는 죽책이 보인다. 지금은 큰 건물들이 마을을 둘러싸 옥상이 아니고서야 마을 전경을 볼 수 없다.

서우내는 ‘서원동네’라고도 하는데 관심 없을 때는 “그냥 동네이름이 그런가보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서우내를 서운하다는 뜻의 ‘서운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眉巖 柳希春과의 깊은 사연이 있는 ‘조선시대 교육지구’였다.

현재 향교2구 서우내의 마을이름은 취영리取英里다. 취영取英이란 이름을 붙인 데는 동네에 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좋은 인재(英材)를 많이 배출하고 또 보유(取)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다.

서우내는 조선시대에는 潭陽府 東邊面으로 현 향교1구인 鄕校와는 다르게 교촌校村이라 했다. 서원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실제 교촌이라는 이름보다는 서원내書院內라 불렸고 사투리 발음이 섞이고 부르기 쉽게 ‘서우내’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후 좋은 인재를 많이 취하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취영取英(英: 뛰어난 인재)이라 했을 것이다.

현재의 향교 1, 2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뤄졌으며 이때 광동(언골 또는 엉골) 일부는 만성리로 편입되고 일부는 향교리로 합해졌으며 향교3구는 1998년 현 전남도립대학이 들어서며 그곳에 살던 주민들이 향교2구에서 독립하며 3구로 만들고 이름을 신흥마을이라 했다.

향교3구 신흥마을은 덕구재와 향교사거리 중간에 자리한 마을로 담양대학(현 전남도립대학)이 건설되며 이주하게 된 마을주민들이 대거 입주한 마을이다.

이곳은 원래 운교리였으나 주민 대부분이 향교2구 주민이었기에 그대로 향교2구로 편입을 원해 마을을 향교2구로 했었다. 그러나 후에 향교2구에서 독립하며 신흥마을이란 이름을 새로 쓰기 시작했고 현재는 48가구 60여 세대가 거주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은 190여명이다.

신흥마을은 1996년 7월 22일부터 1997년 4월 29일가지 사업비 5억6천여만 원을 들여 15783평방미터의 면적에 40필지를 1차로 조성해 분양했다.

2차 조성은 1998년 11월 19일부터 1999년 3월 22일까지 6억8400여만 원을 들여 11883평방미터에 26필지를 조성해 분양했다. 지금은 거의 분양되고 66필지 중 3필지만 남았다.

마을이 이주하는 일은 생겼지만 교촌이라 하거나 취영이라 한 데는 선현의 깊은 뜻이 있어 서원이 철폐된 이후에도 담양여중학교와 담양여자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여중과 여고가 이설된 이후에도 다시 전남도립대학이 들어서는 원동력이 됐다.

지금 서원 옛터는 죽녹원 안에 있어 대나무가 자라 쉽게 알아 볼 수는 없지만 건물이 들어서 있던 터는 층이 잡혀 있어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서원 이름은 의암서원義巖書院으로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조선 선조 정미년(1607년)에 세웠으며 1669년 봄 임금으로부터 사액 받고 서적과 토지 등을 하사 받았다. 철폐는 흥선대원군 때이다.

眉巖의 자는 인중仁仲이며 시호는 문절文節, 중종 8년(1513)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중종(中宗) 33년 (1538) 무술(戊戌)년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에 합격 등위하고 선조 10년에(1577)에 졸하였다.

계린(桂麟)의 아들로 여류문인인 송덕봉(宋德奉)과 혼인하였으며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 간이다. 근 20년간의 유배생활을 근저로 한 그의 학식과 목민사상은 후일 그를 대사성과 부제학, 전라도관찰사까지 오르게 했다.

성격이 소탈해 집안 살림은 전혀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과 학문, 정치에 관한 도리에 대해 논할 때면 그의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것 들이었다.

호남 학풍의 큰 근간이 된 미암은 사후 좌찬성까지 올랐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과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됐었다.

서우내 서북방을 둘러싸고 있는 서우내 서산에는 지금 연 100만 명을 불러 모으는 죽녹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죽녹원은 원래 담양읍 박종철 씨 소유의 대나무 산이었으나 민선3기 최형식 군수가 축제를 진행하며 “축제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대나무인데 정작 축제가 펼쳐지는 관방제림 근처에서는 진정한 대나무의 풍취를 느낄 수 없다”는 평소 생각을 안타까워 해 박씨를 설득, 현 죽녹원 부지를 매입하고 공원으로 가꾸어 담양 관광문화 역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해 나가고 있다.

죽녹원 앞은 국도29호선이 전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덕고재에 올라 우회전하면 국도24호선을 타고 경상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국도29호선이 확장되며 마을에는 우환이 생겼다. 현재 죽녹원이 들어선 자리는 그 모양이 자라 모양이며 산 형국을 보자면 자라가 물을 마시기 위해 입을 쭉 내민 자세인데 도로가 확장되며 그 머리를 잘라버렸다.

이 자라머리 부분은 동내에서 ‘바우모퉁이’라 했는데 동네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 바위를 돌아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바우모퉁이에 있던 바위가 잘려나가며 서우내는 암으로 세상을 뜬 사람,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한 해에 몇 씩 발생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개발의 뒤편에 서서 죽녹원 때문에 발생하는 소음과 교통 통행 문제 등에 시달리며 자라머리를 다시 복원해 줄 것과 통행권 보장을 갈구하고 있다.

본시 서우내는 미암이 서원을 세울 정도로 동쪽에는 동산이 서쪽에는 서산이 있어 1년 내내 푸르고 조용한 한국의 전형적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 기숙사가 들어서며 동산의 소나무와 기암은 없어지고 그 앞으로 흐르던 개울마저 사라져 옛 정취는 오간데 없고 대학은 소잔하여 옛 여학생들의 생기는 끊기고 말았다.

서우내 마을마저 밤이면 참빗 만들기에 오순도순 정겨웠으나 지금은 대자리도 만들지 않고 서산에 들리던 소쩍새 소리는 옛 이야기가 되어 관광객 잡음만이 이어지고 있다.

서우내를 중심으로 마을 앞 즉, 향교 뒷산은 정두산 또는 경대산이라 하며 마을 서북방을 감싸 안은 산은 서산, 서당이 있던 마을 뒤쪽을 서당골, 서당골을 지나 덕고재에 오르는 재너미 왼편을 서당까끔 또는 서당깔끄막이라 한다.

덕고재에 올라 보면 서북방(현 죽향문화체험마을)에 자리한 산은 성전이라 불리며 덕고재가 자리한 산은 덕삼산德森山이라 했다. 덕德은 보통 지명으로 쓰인 경우 크고 넓다 할 때 쓰이며 삼森은 그대로 나무가 빽빽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큰 사거리(향교사거리)가 생겨 옛 모습은 사라지고 원불교에서 지은 노인요양시설과 예쁜 모양의 민가 3채가 들어섰다.

서우내나 향교나 특징은 마을 앞에 논이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취영마을 앞 전남도립대학 옆 도로와 본지 사무실이 있는 터가 논이었으나 전부 매립됐다. 따라서 주민들은 주로 다른 마을에 논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대일로 연명해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대일하는 사람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작은 석작 하나도 생활용품이 아닌 예술용품이 되어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지만 대일로는 고작 입에 풀 칠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참빗에 이어 1980년대 대자리가 생산될 때는 정말 세상에 없는 블루오션을 이루어 그동안 고생을 만회할 부가 생성되기 시작했으며 당연히 마을은 부촌을 이뤘다.

주민들은 지금도 “참빗 해가지고는 큰돈을 못 벌었는데 대자리 해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며 상전벽해를 가져다 준 대자리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 집집마다 대자리 하나 없는 집이 없어 더 이상 활로를 찾지 못하고 새롭게 들어선 죽녹원은 마을에 번영을 주기는커녕 온갖 피해만 주는데다 대형식당들이 마을을 둘러싸 숨을 못 쉴 지경이라 호소가 면면하고 있다.

게다가 몇 해 전부터는 삼만리 퇴비공장에서 날아오는 쓰레기 썩는 냄새까지 가세해 전남도립대학은 물론 마을에 악취가 진동하니 분노는 폭발 직전이라 정치하는 자들의 혜안이 경각의 시급이다. /서영준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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