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12월 세밑 담양시장 고추전 부근
담양은 전남 북쪽의 변방이 아닌 호남의 중심입니다.
시대를 읽고 선도하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 귀결되나 역사 없는 철학은 테두리 없는 아메바와 같다.
역사성 없는 행위는 모래성과 같고 의식 없는 주장은 처방전 없는 전염병이다. 필요에 의해 급조한 사상은 인민의 의식을 피폐케 하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한 거짓은 영원불멸의 사회악이다.
시방 이러한 부조리가 만연한 데에는 수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가장 큰 원인은 지방천시사상에 기인한 향토사 인식 결여에 있으며 이런 전차로 우선 역사 속에서 담양의 위치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소개한다.
역사시대 담양이 강등된 적은 두 번이다.
담양은 조선시대 영조 4년(1728) 역적 박미구(朴美龜 또는 朴美貴) 태생지라 하여 현으로 강등된 적이 한 번이요 영조 38년(1762) 좌수 이홍범과 이창기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하여 강등된 것이 또 한 번이다.
두 번 다 현으로 강등됐으며 대부분 다른 지역도 그러했듯 10년이 지나 다시 복호됐다.
이에 따라 秋成誌 등 담양관련기록은 역모사건 이후 1728년 11월 담양에 부임한 통훈대부 林光弼을 都護府使가 아닌 縣監으로 기록하고 있다.
降號 이후 현감들의 재임기간은 11개월(通訓大夫 兪勉基, 1730. 8.~1731. 6.)부터 38개월(通訓大夫 尹尙喜, 1733. 9.~1736. 10.)까지 다양하나 다섯 명의 현감이 부임했으며 1738년 府로 다시 復號돼 1738년 8월 부임한 통훈대부 金得大는 다시 도호부사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현으로 강등된 기간은 위에서 보았듯 만 10년이다.
두 번째 강등 기간도 만 10년으로 통훈대부 이종덕(1761. 12.~1763. 10.)이 府伯으로 있을 때 1762년 담양이 역적 홍범의 태생지라 하여 강호되어 현감으로 기록돼 있으며 통훈대부 이연회李延恢(1770. 7.~1773. 12.)는 현감으로 부임했으나 1772년 복호됨에 따라 도호부사로 기록돼 있다.
오늘날 군수가 각종 비리로 직을 박탈당하고 중도하차하니 그 기록 또한 수 백 년 후에도 남아 치욕을 남기리라.
역적 박미구 관련 사건은 정권을 쥐려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 기인한 사건으로 양민의 유민화와 같은 피지배층의 고역, 시대를 현혹하는 비서秘書 등이 연관된 사건으로 삼남에서 두루 동조했으며 정권에서 제외돼 외직과 향직에 머무르는 재지사족층이나 그마저도 들지 못한 잔반들 즉, 세가명족의 후예이나 정치 참여를 할 수 없었던 세력이 일으킨 난리이다.
그 역모의 선봉에 이인좌李麟佐가 나섰으며 그는 충주성을 함락시키고 호남과 영남 소론계열, 양민, 화적 등을 취합해 세를 늘렸다. 그 중 호남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이 가장 강성이었다.
그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과 관련됐다고 주장하고 당(소론)을 위한 논거라면 거침없이 늘어놓았다. 이때 인접한 도호부 담양에 부사 심유현이 있었는데 그 역시 박필현과 같은 강성 계열(준소峻少)이었다.
그가 강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연유는 경종 비 심씨가 그와 남매간으로 심유현 집안은 막강한 외척이었다.
그런데 누나인 심씨가 남동생 심유현에 말하길 “자신이 임금(경종)의 승하를 임종하였는데 그 모습을 괴이하다”하여 왕의 사인에 의혹을 품자 이는 필시 독살됐다하여 소문을 퍼뜨리고 괴서나 흉서로 노론을 공격했다.
이에 괴소문은 삽시간에 삼남으로 퍼졌나갔고 시대에 불만을 품은 화적이나 노비뿐만 아니라 양민들까지 합세해 비기에 전해온 새 시대를 열겠다고 하여 이인좌의 난은 경종이 승하한 직후부터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약 4년간 준비됐다.
역모의 기본전략은 외방外方에서 먼저 일으키면 경중京中에서 응한다는 외기내응外起內應으로 정했다. 경중내응은 준소·탁남·소북계 세력이, 외방기병은 정세윤·이인좌의 지도 아래 외방 토호와 재지사족층이 하기로 했다.
그러나 같은 소론 계열로 온건파(완소緩少)였던 최규서가 용인에 있을 때 역적모의를 알게 돼 왕에게 ‘역정포고의逆情布告議’라는 ‘토난책討難策’을 건의, 그동안 모의에 가담했던 자들이 등을 돌려 결국 역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시문서인 <간재집>으로 유명한 간재艮齋 최규서崔奎瑞는 난이 평정된 뒤 영조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의 어필을 받았으나 공신에 녹훈을 끝내 거절했다. 언관으로서 당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나 온건한 처사로 상대로부터 인정받았으며 지방관일 때는 선정으로 이름 높아 특히 전라감사 시절 백성들로부터 삼한三閑을 인정받았는데 삼한은 부서한(簿書閑: 관청의 문서가 한가함), 공방한(工房閑: 아전들이 한가함), 기악한(妓樂閑: 기생과 풍악이 한가함)을 뜻한다.
역사는 역적에 대해 자세히 남기지 않았으나 비변사 등록과 조선왕조실록에서 박미귀나 심유현의 국문 기록이 남아 있으며 특히 심유현은 철환과 화약 등 병장기를 빼돌렸다는 기록이 있다.
朴美貴는 사람들 사이에 미구美龜로 불렸으며 당시 혼란한 사회에서는 “황후(누런 원숭이)의 해이므로 백의서생(白衣書生: 상복을 비유)이 조정(朝廷)에 찰 것이다”라는 비기의 내용이 나돌았다.
이러한 역모가 일어난 데까지는 복합적 원인이 있겠으나 소론은 노론의 좌장 송시열의 논거를 물리치고 희빈 장씨의 아들 균을 왕세자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 이후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자신들이 지지한 왕세자 균(후일 경종)을 숙종의 뒤를 이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하나 경종이 병약해 이복동생인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허락하여 후계를 이을 자를 정할 정도로 몸이 쇠약했으며 결국 재위 4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러한 급박한 상황은 소론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종 재위 동안 사화를 일으켜 노론에 대해 유배와 사사를 일삼았던 소론은 경종의 후계로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숙종과 숙빈 최씨의 소생, 후일 영조)이 정해져 있던 터라 언제고 죽을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새로운 왕을 옹립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정권의 주류에 합류하지 못 할 것이라는 계산과 함께 노론의 공격까지 받아야 할 운명에 선 과격 소론 계열은 ‘물리력’을 선택했다.
역사는 숙명의 장난을 좋아한다.
이 사건이 바로 이인좌의 난(또는 무신란戊申亂)이요 담양이 현으로 강등된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왕을 매형으로 둔 심유헌이 담양부사로 있는 동안 그 왕의 권력을 넘겨받을 씨앗이 담양에서 자라났으니 그가 바로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본시 창평인으로 역병에 양친을 잃고 월산면 용흥사 주변 암자에서 기거했다 한다. 나이는 어리나 영특한 자태로 주지의 눈에 띄어 절에서 기거했던 여아 최씨는 용구산의 영험으로 계시를 받아 한양으로 입성하기에 이르며 결국 틀이 좋고 바른 품세는 그녀를 궁궐로 들여보냈다.
그런데 이 숙빈 최씨의 영조 잉태야말로 드라마틱하다.
희빈 장씨의 모략에 쫓겨난 인현왕후의 무수리 최씨는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녀의 생일이면 상을 차려 놓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숙종이 궁을 거닐고 있었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알아보니 무수리 최씨가 인현왕후에 대한 충의를 져버리지 않고 그녀의 생일이면 상을 차려놓고 기원을 드린다하니 이에 감복해 그녀를 안았고 이때 잉태한 후손이 바로 영조이다.
이처럼 담양은 누나를 왕비로 뒀던 담양부사 심유현으로 인해 당쟁 중에서도 가장 폐악한 역모의 본거지가 되고, 몽성산 영험을 품은 숙빈 최씨로 인해 그 역모를 평정하고 성군이된 영조의 모태지가 되어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아이러니한 역사의 현장'이 됐다.
조선시대 전라도 군현 편제
현지역 | 府尹 (종2품) | 牧使 (정3품) | 都護府使 (종3품) | 郡守 (종4품) | 縣令 (종5품) | 縣監 (종6품) | 계 |
전라남도 |
| 나주 | 담양 장흥 순천 | 영암 영광 진도 낙안 보성 | 창평 능주 | 곡성 옥과 남평 광양 구례 흥양 동복 화순 장성 진원 함평 무안 강진 해남 | 25 |
광주광역시 |
| 광주 |
|
|
|
| 1 |
전라북도 | 전주 |
| 남원 | 익산 김제 고부 금산 진산 여산 순창 | 용담 만경 임피 금구 | 임실 장수 운봉 진안 무주 정읍 흥덕 부안 옥구 용안 함열 고산 태인 고창 무장 | 28 |
제주도 |
| 제주 |
|
|
| 대정 정의 | 3 |
계 | 1 | 3 | 4 | 12 | 6 | 31 | 57 |
역모는 붕당정치의 폐악에 기인한다.
그러나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는 사망할 때까지 장희빈의 아들 균(경종)이 왕세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 연잉군이 임금이 될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영조는 임금이 되자마자 미천한 출신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을 어머니를 위해 소령원의 비문을 소령묘(昭寧墓)에서 소령원(昭寧園)으로 고치고 싶었지만, 후일을 기약하고 숙빈 해주최씨소령묘(淑嬪海州崔氏昭寧墓)라는 친필 비석을 세우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박미구 역모사건 때 담양부사 심유현은 반역에 가담하여 화약과 철환을 만들어 빼냈다는 혐의를 받아 국문 끝에 복폐됐었다.
이외 현 금성 원율리 지역에서는 조정이 무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신분제가 혼란해진 틈을 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점과 ‘백제부흥’의 기치를 세워 이연년 형제가 난을 일으키자 새 세상을 열자 하여 농민들의 호응이 높았다.(1232년) 이에 원율과 담양은 물론이요 광주와 화순 등까지 복속시켰으나 길게 가지 못하고 7년 만에 진압된다.
이연년은 자신을 백제도원수라 칭하고 새 세상을 꿈꾸었으나 무인정권 중 1인이었던 김경손이 와해됐던 관군을 나주에서 재집결해 이연년의 군사와 접전을 벌여 진압했다. 이로 인해 폐현된 뒤 복호되지 못하고 공양왕 13년(1391)에 담양 감무가 원율현을 겸하게 됨으로써 담양지역에는 창평현과 담양군만 남게 됐다. (후편에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