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어 물먹는 尾鯉山 현대사 아픔 안은 쉬영고개 - 백동리③

▲쉬영고개에서 바라본 담양읍 전경. 추월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담양을 껴안는다.

‘잣굴’이란 이름에서 연원한 백동(栢洞). 고개를 뜻하는 ‘자’에 마을을 뜻하는 ‘골’이 합해져 자+골>자굴>잣굴로 변천했다.

잣굴 백동은 현재처럼 한 개의 담양읍이 형성되기 전인 조선시대에는 담양군 서면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이 되며 신기리(新基里)와 동변면(東邊面)의 내동(內洞) 및 삼거리, 무면(武面)의 향백동(香栢洞) 일부와 목면(木面)의 두곡리(斗谷里) 일부를 합하여 백동리(栢洞里)로 정하고 담양읍에 넣었다.

지금은 도로가 넓어져 백동 3구인 새터 신기가 백동리와 멀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백동리에서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신기는 마을 앞에 주벅(주걱)모양의 ‘주벅들’을 가진 풍족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도로에 편입돼 없어지거나 양곡창고와 덕인관 등 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아직도 옛 영화는 이어져 백동4거리부터 신기에 이르는 논 값이 다른 지역의 열 배가 넘는다.

그런데 이 신기마을 뒷산(현대오일뱅크주유소 뒤편) 이름이 ‘괴머리콧배기산’으로 마을이 산에 안겨있는 형국이다. ‘괴’는 ‘고양이’의 다른 말로 이 산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 산 넘어 있는 ‘말머리’(무정식당 앞)부터 마을 앞에 이르는 고갯길을 ‘쉬영고개’(쉬영은 호리병의 뜻)라 하는데 그 고갯길이 호리병모양으로 구불구불하고 또 쉬엄쉬엄 넘어가야 할 정도로 높아 이름이 그러하다. 이 쉬영고개는 광주와 담양을 잇는 주요 길목으로 지금은 없어졌으나 도로가에(담양공고 건너편) 대나무의 고장 담양을 알리는 죽종장이 있었다.

또 이곳은 지금부터 30~40년 전만해도 상의용사집단거주지인 ‘정양원’이 있었는데 현재 담양교육지원청 자리이다. 그곳에 거주하던 상의용사들은 생활고를 못 이기고 고개를 넘지 못해 덜덜거리는 차량이나 우마차를 도와준다고 달려들어 물건을 몰래 훔쳐가는 일이 허다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괴머리콧배기산’은 광주와 담양을 잇는 길목이자 양각리부터 시작해 수바래, 강쟁리에 이르는 너른 들녘을 지키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고양이 형국의 산이 들녘의 양식을 쥐로부터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동리하면 백동2구 삼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삼거리 앞에 광고사 건물을 비롯해 많은 건물이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삼거리 한 가운데 커다란 수양버들 나무가 있어 나무를 둘러 돌아가는 로터리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옛 삼거리터는 시원하고 넓다. 그 삼거리에서 서편으로 들어가면 또 작은 삼거리가 나오는데 작은 떡방아간과 이 마을 이장이 운영하는 권창희미용실이 있다.

그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가면 담양경찰서 후문이 나오고 향백동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 계속가면 대나무건강랜드와 대한지적공사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다보면 청전주유소가 나온다. 이 청전주유소 못 미처 갈라진 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자연한그릇 식당과 서당골이 나온다. 자연한그릇 뒤에 난 작은 길을 여우 울음소리가 난다고 해 ‘여시고개’라 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옛 원강어린이집 쪽으로 이어진다.

청전주유소를 지나면 왼편에 청전아파트가 자리하고 있고 그 도로 건너편은 대밭이 있다. 이 대밭 뒤편을 ‘뒤까끔’이라 하는데 바로 청전식육식당 뒤편이다.

그 뒤까끔을 지나면 모래시암걸(모래샘 거리)이 나오는데 구 88고속도로 통로암거 아래 부근으로 바닥이 모래인 샘과 작은 둠벙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교회가 들어서 있는데 본래 모래샘가든이라는 식당을 개조해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흑비정이라는 꽤 유명한 흑염소탕집이 있다.

모래시암걸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오실마을 입구가 나오고 길을 따라 쭉 내려가다보면 가야금을 만든는 범음국악사와 ‘꽂정이’(꽂쟁이)가 나온다. 꽂정이는 무정면의 초입이라 할 수 있으나 지금은 담양읍이다.

향백동 서편마을 부삿골은 전편에서 알아보았듯 부사들(동래부사 김자민, 거제현령 김준민, 삭주도호부사 김성일)이 살아 이름이 부삿골로 전해지고 있으며 약 16~17여 년 전쯤 ‘부삿골’이란 식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담양장례식장으로 바뀌었다.

다시 삼거리로 와 보면 예전에 ‘백동제’가 있던 방죽터가 나온다. 지금은 한국농어촌공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 대나무건강랜드가 있는데 그 곳은 일진면업사가 있던 곳이다. 원래 일진면업사가 들어서기 전 한일죽공주식회사라는 검도용 죽도공장이 있었는데 채산성이 떨어져 공장을 옮기자 그곳에 일진면업사(일명 솜공장)가 들어왔다.

백동2구 뒷산이라 할 수 있는 미리산은 사람이 살지 않다가 지금부터 80여 년 전 국한룡씨 선산지기로 유재도 씨가 살면서 집이 들어섰다 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미리산에 있는 담양공공도서관 자리에 일제시대에는 선교사가 교회를 짓고 선교활동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교회가 아래로 터를 옮겨 백동교회로 아직도 맥을 이어 오고 있다. 또 도서관 동편으로 ‘행복한교회’가 새롭게 생겼다.

미리산(尾鯉山) 형국은 잉어가 물을 먹는 산세이나 풍수지리로 보면 너무나 훼손됐다. 잉어 등에 큰 건물이 들어섰고 잉어가 먹을 물인 양샘(양새암, 현재 가나철물 옆 세차장 자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잉어는 귀한 자식이나 출세의 전형이어서 도서관이 잉어자리에 간 것은 좋은데 잉어가 뛰어오르지 못하게 누르는 형국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 도서관이 산 정상부에 있어 학생들의 이용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도서관이 생긴 이후에도 어디에 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것이 ‘고사리등’과 ‘쉬영고개’이다. 아마도 도로가 넓어지며 원형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쉬영고개'는 앞서 말했듯 담양공고 앞 정점을 가운데로 하여 담양과 광주를 잇는 고갯길이고 그 동편에 있는 양지바른 동산이 고사리등이다.

현재 현대자동차공업사 앞 편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은 현대자동차공업사에서 다 사용하고 있으나 예전의 식당 터와 그 앞 뜰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은 지대가 높고 앞이 탁 트여 형세가 좋아 기록에 의하면 선조 때 임진왜란 공신인 김응회(金應會)가 살았고 철종 대에는 홍문관 교리 고택겸(高宅謙)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높은 벼슬아치가 사는 고개라는 의미로 고사리등(高士吏嶝)이라 쓰기도 하나 고서리(高庶吏)나 같은 말로 포감리(捕監吏, 요즘의 경찰)나 군관(軍官)을 양성하는 곳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영준 記者

▲한국농어촌공사 담양지사 앞마당에 자리한 백동제 터 기념비. 비석에는 ‘향백동제지비(香栢洞堤址碑)’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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