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마저 쉬게 하는 안빈낙도

광주호를 낀 높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식영정. 구불구불한 계단을 오르는 것도 재밌지만 주위의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선 식영정은 대표적인 호남의 정자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자(影)를 끊고(息) 존재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진 식영정. 정자의 주인은 인생이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신기루 같고, 그림자 같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호에선 식영정에 올라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소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식영정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광주호가 한 눈에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다. 고즈넉한 운치를 자랑하는 이곳은 정철이 별뫼[星山]를 바라보며 ‘성산별곡’을 지은 곳으로 유명하다.

“안과 밖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으니”

붕당 폐해 경계한 선비
사화 발생하자 관직 벗어
담양서 소탈한 삶 보내

식영정은 명종 15년(1506) 김성원이 지어 장인인 임억령에게 바친 곳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정자로, 보통 가운데 방을 두고 있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마루를 깐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널찍한 대청마루를 가진 식영정에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다.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방도 큼직한 문을 열어두면 언제든지 광주호의 시원한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담양 일대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아 수많은 문인들은 이곳에서 성산을 바라보며 시와 노래를 읊었다고 한다.
너와 나를, 안과 밖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으니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시를 짓고, 널찍한 대청마루를 달 그림자에게 내어준 모양 때문인 듯하다.

好在漢江水
安流莫起波

잘 있거라, 한강수야
평온하게 흘러서 파도를 일으키지 말라

이 시의 배경은 인종이 승하(1545)하고 어린 임금(명종·11세)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밀지를 통해 인종의 외삼촌 일당을 제거하는 것에 반발하는 내용이다. 이때 문정왕후의 측근인 임백령이 형 임억령에게 이같은 모의를 알리고 함께 일하기를 권유했지만, 오히려 동생인 백령에게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백령이 말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임억령은 한강까지 전송나온 백령에게 위 시를 지어줬다고 전한다. 괜스레 외척들이 붕당이나 일으켜서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충고에서다. 임억령의 됨됨이를 잘 나타내주는 일화다.

석천 임억령(1496~1568). 그는 시문에 뛰어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해남 동문 밖 해리에서 태어났다. 석천(石川)이란 호도 그가 태어난 마을의 개울 이름이다. 그의 형제는 오형제였는데 이름 중에 마지막 글자 령은 문중의 항렬이고, 가운데 글자는 대망을 의미하는 숫자인 천, 만, 억, 백, 구를 얹어 천령, 만령, 억령, 백령, 구령이라 지었다.

셋째인 억령은 부친을 여윈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눌재 박상의 제자가 된다. 이 때 동생 임백령도 같이 공부를 하였는데 박상은 억령에겐 장자를 읽으라고 하면서 “너는 문장이 될 것”이라고, 백령에게는 논어를 공부하라고 하면서 “족히 나랏일을 담당할 것”이라고 각각 일렀다.

어릴 적에 임억령은 벼슬에 별 뜻이 없었다. 서른 살이 된 1525년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1544년에는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임억령은 벼슬을 버리고 산골 외진 곳으로 내려와 제문을 짓고 살았다. 이때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竹老元逃削
松高不受封
何人與同調
窮谷白頭翁

대나무가 늙었으니 베어 쓰이는 것 피하였고
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을 받지 않는다
누가 송죽과 같이 지조를 같이 할꼬
깊은 골짜기에 머리 흰 늙은이로다

이 시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지조를 지닌 임억령의 의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억령은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 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평하고 있다.

‘그림자를 쉬게 하는’ 자연사상

노장사상 담긴 식영정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노학자의
기품과 세상을 읽는 관조 돋보여

임억령은 이후 잠깐 벼슬에 나아갔다. 62세인 1557년에 담양부사를 3년간 역임한 뒤 사직하고 담양 성산 아래 식영정에서 자연을 벗삼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낸다. 이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정철, 고경명, 양응정 등 쟁쟁한 선비들이었다. 특히 임억령과 김인후, 기대승과 양응정 등을 ‘성산 사선(四仙)’이라 했고, 임억령과 김성원, 정철, 고경명 등을 ‘식영정 사선’이라 칭했다.

秋山吐凉月
中夜掛庭梧
鳳鳥何時至
吾今命矣夫

가을 산이 시원한 달을 토해 내어
한 밤중에 뜰에 서 있는 벽오동나무에 걸렸네
봉황은 어느 때에나 오려는가
나는 지금 천명이 다해가는데

임억령은 3000수나 되는 시를 남긴 시문의 종주다. 시 솜씨는 이백을 닮았고, 만년에는 두보의 시법을 터득했으며, 문장은 장자의 남화경을 근본으로 했다. 그가 세속에 얽매임이 없는 도인이었던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식영정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정자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이곳을 찾은 이들을 연못과 광주호 물가로 직접 내려설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지만, 물가로 이어진 돌계단을 따라 연못가에 앉아서 하늘을, 땅을, 나무를, 길가에 핀 꽃을 바라보게끔 자연스레 이끈다.

식영정 주변에 서 있는 노송도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다. 그 풍모야말로 이곳이 관록있는 장소라는 점을 한 눈에 알아채도록 하지만, 보기에 따라 이 노송은 마치 기품있는 노학자가 조용히 머리를 숙여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광경으로 보이기도 한다.

식영정의 뜻은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서정적인 뜻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호방하고 무애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은둔과 조화와 순리의 동양사상, 다시 말하면 노자와 장자의 자연론이 담겨 있다. ‘그림자 끈’을 끊어버려야 비로소 대자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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